시민평론단 - 비전
주인공 춘희는 먼저 세상을 떠난 남편의 모든 것을 애지중지 아낀다. 운전도 못하면서 남편이 타던 차를 매일 닦고, 칠 줄도 모르는 남편의 피아노도 하루도 거르지 않고 손질한다. 처음에는 고집스러워 보이던 그녀의 행동이 점차 이해되고, 결국에는 아름답게까지 느껴진다. 이는 감독의 섬세한 캐릭터 설정과, 때로는 소녀 같지만 누구보다 어른스러운 춘희의 모습을 생생하게 그려 낸 김혜옥 배우의 섬세하면서도 깊이있는 연기 덕분이다. 영화 속에서 각기 다른 아픔을 가진 인물들이 서로의 모자란 부분을 채워준다는 점에서, 배우들의 조합도 흥미롭다. <애프터 양>과 같이 작가영화 성격의 작품에서 두각을 보인 저스틴 H. 민과 한국드라마에서 친근하고 생활력 있는 배역을 많이 맡은 김혜옥 배우의 연기 앙상블은 인물들의 서사를 더욱 설득력 있게 완성한다. 그리고 성찬 역의 박대호 배우는 실제 피아니스이며 대부분의 곡을 직접 연주했다는 점에서 작품에 진정성을 부여한다.
<흐르는 여정>에는 악인이 없다. 보통 영화를 흥미롭게 이끌기 위해서는 갈등과 이를 유발하는 악인이 필요하지만, 이 작품에는 그런 전형적 요소가 없다. 그럼에도 두 시간이 넘는 상영 시간을 지루하지 않게 만드는 힘은 캐릭터에서 비롯된다. 와인잔에 담긴 막걸리만 비춰도 관객이 미소 짓게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생생한 인물들 속에서 서사와 디테일 역시 놓치지 않았다. 다소 갑작스러워 보일 수 있는 춘희의 마지막 결정도 영화 곳곳에 배치된 투병 장면과 ‘메리 크리스마스 & 해피 뉴 이어’를 미리 전하는 그녀의 행동을 통해 설득력을 얻는다. 그럼에도 영화는 춘희와 같은 선택지를 관객에게 제시하지 않는다. 다만 그녀의 선택도 존중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묵묵히 일깨운다.
아쉬운 점도 있다. 갈등이 전혀 없는 서사는 자칫 판타지로 비칠 수 있으며, 매일 닦고 매년 조율한 피아노에서 민준이 이상한 소리를 듣고 쪽지를 찾아내는 설정은 조금 억지스러워 보인다. 그러나 감독이 일상의 갈등보다 아름다움에 집중한 만큼 관객도 그 의도를 따라가야 하지 않을까. 듣지 못하는 남편이 아내를 위해 작곡했다는 이야기가 주는 울림은 작은 설정의 공백을 채워 준다.
‘미덕’은 사전에서 ‘아름답고 갸륵한 덕행’으로 정의된다. 하지만 ‘아름답다’는 주관적이기에 사회상에 따라 미덕은 변한다. 과거에는 집단과 희생을 중심으로 한 미덕이 많았다면 현대는 개인과 자율을 강조하는 가치가 부각된다. 사회가 바뀌면 미덕도 변하지만, 그 과정에서 과거의 미덕을 단순히 어리석은 것으로 치부하는 경우도 많다. 그런 점에서 <흐르는 여정>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잊고 지낸 미덕이 무엇인지 다시금 돌아보게 하는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