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영작 리뷰

시민평론단 - 비전

<흐르는 여정> : 너와 나는 가닿을 수 있을까?

By 정다은

우리는 서로에게 가닿을 수 있을까. 영화의 오래된 꿈이자 예술의 근원적 목적 같은 이 질문에는 늘 각자의 답이 있다. 농인 가족 속, 혼자만 들을 수 있다는 외로움을 간직한 소녀가 가족의 완연한 연결고리 속에 안착하는 순간, 그리고 살을 부딪히는 따스함을 느낀 순간 영화가 끝나는 것처럼(<나는 보리>), 김진유 감독의 영화적 지향은 언뜻 동어반복처럼 보인다. 아닌 게 아니라 이번 작품 역시 가족이며, 그 주제는 또다시 ‘연결’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반복은 단순한 되풀이가 아니라 감독이 집요하게 응시하는 삶의 핵심일지도 모른다.

춘희(김혜옥)는 먼저 세상을 떠난 남편 현철과 뒤늦은 이별을 겪는 중이다. 매사 까다롭고 확고한 취향을 지닌 남편과 살아가는 일은 피곤하기도 했지만, 그 덕에 춘희는 아름다움을 탐미하는 법을 배웠다. 그녀가 오래된 사랑을 간직하는 방식은 남편의 물건을 정성껏 닦는 일이다. 새로 이사한 집에서도 그녀는 남편이 아끼던 물건을 부지런히 닦고 또 닦는다. “산다는 것은 끊임없이 먼지를 닦는 일, 죽음이란 소복한 먼지를 그대로 두는 것”이라는 나레이션이 흐르는 순간, 관객은 언젠가 우리에게도 쌓일 먼지를 떠올린다. 춘희에게 삶이란 정말 먼지를 닦는 일처럼 덧없는 것이었을까.

하지만 유추해보건대 춘희는 겨우 쌓인 먼지에만 매달릴 인물이 아니다. 춘희는 부모를 일찍 여읜 재능 있는 피아니스트 성찬에게 유학비를 선뜻 건네고, 독일에서 어머니를 찾으러 온 청년 민준에게는 남편의 피아노를 내준다. 자식을 가져본 적 없는 그녀는 자신을 내어주며 타인을 품는 존재다. 낙산사의 암자에서 민준이 바닥에 웅크린 채 일어나지 못할 때조차, 춘희는 모든 것을 감싸는 바다처럼 곁을 지킨다. 굽은 등을 걱정해 펴 주고, 오므라든 어깨를 다독이며 곧게 펴 주는 그녀의 손길은 어머니와 할머니의 사랑을 닮았다.

춘희에게 먼지를 닦는 일, 빗줄기 쏟아지는 아파트 현관을 쓸어내는 일은 단순한 습관이 아니라 사랑을 수행하는 방식일지 모른다. 사소해 보이는 반복적 행위들이 결국은 타인을 향한 애도의 연장선이자 삶을 지탱하는 힘으로 드러난다.

영화는 배우들의 존재감에서도 빛난다. 브라운관에서 익숙한 ‘어머니’의 얼굴이었던 김혜옥은 이번 작품에서 춘희로 다시 태어나 깊은 울림을 전한다. <모어>의 모지민, 카페 사장 역의 권혜효, 아파트 부녀회장 정이랑 등 반가운 얼굴들은 마치 스크린 너머로 관객에게 따뜻한 인사를 건네는 듯하다. 그 웃음과 시선은 단순한 연기가 아니라, 오랫동안 관객 곁에 성실히 머물러온 배우들의 삶과 겹쳐진다.

<흐르는 여정>은 거창한 화해나 극적인 반전을 택하지 않는다. 대신 먼지를 닦고, 비에 젖은 현관을 쓰는 사소한 몸짓 안에서 삶의 무게를 길어 올린다. 그 일상적 행위들은 사랑의 또 다른 얼굴이며, 이별을 견디는 방식이다. 김혜옥 배우의 연기는 그 소박한 몸짓들을 하나하나 설득력 있게 채워 넣는다. 스크린 너머로 건네지는 그녀의 연기는 관객에게 오래된 안부를 묻는 것처럼 다가온다. 그것이 영화가 끝나고도 한동안, 김혜옥의 얼굴을 잊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BNK부산은행
제네시스
한국수력원자력㈜
뉴트리라이트
두산에너빌리티
OB맥주 (한맥)
네이버
파라다이스 호텔 부산
한국거래소
드비치골프클럽 주식회사
Ministry of Culture, Sports and Tourism
Busan Metropolitan City
Korean Film Council
BUSAN CINEMA CENT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