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평론단 - 비전
이광국 감독의 <단잠>은 홀연히 떠나버린 한 남자와, 그가 남기고 간 아내 인선 그리고 딸 수연 사이의 관계를 섬세하게 들여다본다. 겉으로는 상실 이후의 애도를 다루지만, 한 걸음 더 들어가 보면 부재한 존재가 남긴 빈자리가 가족 관계에 어떤 변화를 불러오는지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을 담고 있다.
특히 눈여겨볼 점은 이미 세상을 떠난 남편이자 아버지가 반복적으로 등장하며, 영화 전체를 강하게 지배하는 그의 존재감이다. 그는 실제로는 사라졌지만, 오히려 그 부재를 통해 더 뚜렷하게 다가온다. 시계, 전달되지 못한 편지, 그리고 인물들의 기억 속에서 그는 여전히 수연과 인선의 일상에 영향을 미친다. 상실은 단순히 누군가의 사라짐이 아니라, 오히려 새로운 형태의 관계와 감정을 만들어낸다는 점을 보여준다.
똑같이 가족을 잃었지만, ‘딸’과 ‘아내’라는 서로 다른 위치에서 두 사람은 전혀 다른 상실을 겪는다. 가족의 자살이라는 예기치 못한 사건이 두 인물에게 각기 다른 상처를 남긴다. 수연에게는 아버지를 처음 발견한 충격과 설명할 수 없는 남겨짐의 감정이 남아 있다. 인선에게는 남편이 왜 이런 선택을 했는지, 이유조차 남기지 않은 것에 대한 허망함과 깊은 슬픔이 자리 잡고 있다. 이렇게 서로 맞닿지 못하는 감정의 간극이 두 사람 사이에 큰 틈을 만들어낸다.
수연과 인선이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고 각자의 괴로움 속에 머무는 모습을 여러 장면으로, 한 집에 같이 있지만, 서로에게 진심어린 한마디 말조차 건네지 못하고 각자의 일상만 이어가는 두 사람의 모습은 상실 이후 가족이 어떻게 단절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하지만 영화는 끝끝내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다. 느리지만 분명하게, 두 사람이 서로에게 조금씩 다가가는 과정을 담아낸다. 수연과 인선은 서서히 무너진 일상에서 다시 삶의 리듬을 찾으려 애쓴다. 애도는 끝내는 사건이 아니라, 시간에 따라 모양을 달리하는 긴 여정임을 담담하게 보여준다. 두 사람은 남편이자 아빠를 완전히 떠나보내지는 못했지만, 그의 빈자리를 받아들이며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는 법을 배워간다. 상실 이후의 삶은 예전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재구성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조용히 이야기한다.
<단잠>은 남겨진 사람들의 관계가 상실을 통해 어떻게 변화하고 다시 만들어지는지를 조용하고 세심하게 그려낸 영화다. 세상을 떠난 가족은 더 이상 곁에 없지만, 그 부재는 여전히 수연과 인선의 관계를 살며시 흔든다. 두 사람의 복잡한 감정의 지형을 따라가다 보면, 애도가 단순히 개인의 고통이 아니라 서로의 관계에서 펼쳐지는 이야기임을 알 수 있다. 마지막 장면에서 지어지는 수연의 미소는, 부재한 존재와 함께 살아가는 삶도 절대 불가능하지 않다고 말하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