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평론단 - 비전
<흐르는 여정>은 <나는 보리>에 이은 김진유 감독의 두 번째 장편 연출작으로, 강원도 강릉시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감독답게 이번 작품 역시 아름다운 강릉을 배경으로 섬세하게 연출한다. 영화는 춘희(김혜옥)가 남긴 편지를 읽는 민준(저스틴 H.민)의 내레이션을 따라 한 단독주택의 문 앞으로 흘러 들어간다. 사별한 춘희는 남편이 남긴 그랜드피아노를 이사한 집에 넣지 못해 고민하던 중 민준을 만나게 되고 이야기는 시작된다.
건축가였던 남편이 만든 집에서 30년간 살아온 춘희는 남편의 흔적으로 가득한 그 집을 온전히 감당할 수 없다. 춘희는 피아노와 오래된 자동차 그리고 식물 하나를 챙겨 아파트로 이사한다. 피아노 연주는 할 줄 모르고 운전 역시 할 줄 모른다. 식물 또한 여간 키우기 어려운 게 아니다. 춘희에게 쓰임새가 없는 사물들이지만 아이러니하게 영화의 흐름을 새롭게 만들어낸다. 마치 남편이 떠나면서 선물해 준 것처럼 춘희와 민준을 만나게 하고 민준의 제자인 성찬(박대호)까지 세 사람을 연결한다. 민준이 가르치고 춘희와 성진이 함께 연주해 곡을 완성 시키는 장면은 세대를 어우르고 하나의 공동체 또는 유사 가족이 되어감을 시각적 그리고 청각적으로 보여준다.
‘삶이란 끊임없이 쌓이는 먼지를 닦아내는 것, 죽음이란 그저 먼지가 쌓이는 것.’이라는 대사처럼 춘희는 살아있음을 증명하듯 매일 피아노를 닦고 주차장 한편을 지키고 있는 오래된 자동차를 닦는다. 그리고 민준의 삶을 돌본다. 항상 도울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인 것처럼 도울 수 있는 일이 생기면 주저하지 않고 도움을 주기 위해 방법을 찾는다. 춘희가 가진 온기가 여기저기 흘러 들어가 주변을 따뜻하게 만드는 모습은 세월과 상처가 만든 마음의 더께들을 외면하지 않고 닦아내 길을 만들어 다시 살아가게 하는 연대감을 만들어낸다. 하지만 주저하지 않는 그 움직임들은 오히려 무언가 다가오고 있음을 불현듯 느끼게 한다.
춘희는 민준에게 거듭 반복하며 '회자정리 거자필반(會者定離 去者必返)'에 대해 말한다. 만나는 사람은 반드시 헤어지게 되고, 떠난 사람은 반드시 돌아온다는 불교의 법화경에서 유래된 이 문구는 언뜻 영화의 제목과 궤를 같이하는 듯하다. 민준에게 위로를 건네며 한 말이었지만 영화를 관통하는 문장으로 관객에게 영화의 끝을 서서히 암시한다. 비가 내리는 날이면 춘희는 주차장에 덩그러니 남겨진 자동차에서 혼자 노래를 듣는다. 춘희의 사무치는 외로움과 그리움이 스크린을 넘어와 먹먹함을 남긴다. 감히 흉내 낼 수 없는 연륜의 연기 속에서 관객은 같이 침잠한다.
영화는 감독의 전작에서 보여줬듯 사람에 대한 애정과 따뜻한 시선을 잃지 않는다. 소란스럽지 않게, 그러나 분명하게 삶의 본질적인 감정들 —상실, 회복, 연대—를 아우르며 영화의 여정을 흐르게 한다. 여정은 끝나지 않았다. 흰색 사이드미러를 단 검은색 자동차가 길을 달리고, 아름다운 선율을 만들어내는 피아노와 함께 계속 흐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