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평론단 - 비전
고전적 영화 문법에서 서사는 관객의 몰입을 견인하는 장치였다. 그러나 최승우 감독의 <겨울날들>은 의도적으로 주인공을 특정하지 않고, 갈등이나 사건도 전개하지 않는다. 대신 ‘죽은 시간’이라 불리며 흔히 제거되던 일상의 파편들을 롱테이크와 최소 편집을 통해 고스란히 전달한다.
감독의 전작 <지난여름>이 농촌의 일상과 시간을 다루었다면, <겨울날들>은 도시 서울의 겨울에 고정된다. 농촌의 현실이 있는 것처럼 도시에도 고유한 현실이 존재하는데, 그 겨울은 견뎌야 하는 삶의 조건으로 설정된다. 시나리오의 여섯 장 지문 형식과 기승전결의 부재는 영화가 내러티브 없이도 가능한 구조임을 보여주며, 반복적인 노동과 일상 행위를 중심으로 영화의 리듬을 구성한다.
그러면서 영화는 이미지와 사운드에 집중하고 있다. 이야기를 구축하기보다 화면에 흐르는 리듬과 침묵과 소리의 충돌 속에서 영화라는 매체의 근원적 가능성을 드러내는 것이다. 반복되는 도시 풍경과 인물의 행위와 라면봉지 같은 몽타주는 회화적 리듬을 형성한다. 그러나 영화는 냉혹한 진단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남산에서 바라본 서울 전경, 한강을 건너는 지하철의 순간, 겨울밤의 별빛 등은 미세하지만 확실한 위로의 이미지로 제시된다. 정지된 이미지 안에서도 시간의 흐름과 공간감을 느끼게 하며 관객이 일상과 도시의 질서를 다시 체험하도록 유도한다. 감독의 목표는 자극적이고 빠른 영화에 반하여 시간을 붙잡고 싶은 것임을 알 수 있다.
언어의 부재 또한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특징 중 하나다. 받지 않는 전화, 보일러의 따뜻한 물이 나오지 않는 불편함, 계단을 오르내리는 피로, 주변 환경에도 무감각한 반응 등이 침묵을 전제한다. 반면, 대사가 없는 대신 평소 들리지 않던 사운드가 감각적으로 확장된다. 보일러 고장의 물소리, 전자레인지의 기계음, 계단을 밟는 신발 소리, 출근길 버스와 지하철의 굉음 등은 도시의 현실과 인간 존재의 피로를 동시에 드러내며 영화적 청각 환경을 실감나게 보여준다. 그러기에 등장인물들은 뉴스에서 흘러나오는 자살 기사 등 사회적 비극에도 반응이 없다. 마치 ‘피로 사회’의 초상처럼, 현대 사회에서 충격과 고통이 일상화되면서 개인의 감각이 둔화되는 현상이 반영된다.
영화는 현대 도시인의 실존적 성찰을 유도한다는 점에서 동시대 아시아 영화 실험과도 맥을 잇는다. 차이밍량의 영화와 비교하면, 두 감독 모두 대사를 최소화하고 반복적 일상을 통해 도시인의 고립과 공허를 시각화한다. 차이밍량은 물과 젖은 공간 등으로 정체된 시간을 강조하지만, 최승우는 도시 소음과 계단의 반복으로 ‘시간의 무게’를 구현한다. 홍상수 영화가 일상적 대화와 즉흥성을 통해 삶을 탐구한다면, 최승우는 대화를 제거함으로써 공백을 소리와 이미지로 채운다. 이처럼 <겨울날들>은 아시아 영화작가들이 공유하는 일상과 고립의 미학을 계승하면서도, 한국 도시의 특수한 맥락인 재개발과 노동, 그리고 침묵과 소음을 통해 차별화된 영화 언어를 구축한다.
감독은 엔딩에서도 의도적으로 도시 소음을 남긴다. 이는 관객에게 공간과 시간의 연속성을 체험하게 하고 무감각한 현실을 다시 환기시키지만, 여전히 리듬과 생의 지속성이 존재한다는 점에서 희망적 뉘앙스를 남긴다. 결국 영화는 관객에게 묻는다. “당신의 겨울날들은 어떤 리듬으로 흘러가고 있는가?” 이 질문은 영화의 경계를 넘어, 현대인의 실존적 성찰을 요구하는 철학적 물음으로 확장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