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평론단 - 비전
어릴 적 망상 꽤나 해봤다는 사람들에게 한 번쯤 그 대상이었을 주제가 있다. 바로 영화 <트루먼 쇼>이다. 내가 있는 이곳도 세트장이 아닐까? 나만이 진짜고, 나머지는 다 가짜가 아닐까? 재미있는 상상처럼 보이지만 이런 생각을 계속하게 되면 세상에 나만 남겨진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한다. 여기에 사랑이라는 소재를 더해 사고를 확장해 나간 영화가 바로 <트루먼의 사랑>이다. 어떤 이에게 이 세상이 가짜라는 생각이 심어진다면, 그 사람은 과연 어떤 사랑을 선택할 것인가?
영화의 초반부에는 대칭 구도를 많이 볼 수 있다. 화면의 양옆에 지하철 종점역의 스크린 도어가 마주 보고 있고, 그 가운데 지연이 누워 있는 모습으로 시작된다. 거울 같은 화면 속으로 현식이 들어와 지연을 살피고 깨운다. 이후 지상으로 나가는 에스컬레이터와 도로의 모습 모두 중앙선을 중심으로 대칭으로 담고 있다. 자신을 깨워준 현식을 끈질기게 따라간 지연은 자신이 겪은 ‘에러’라는 현상에 대해 말하기 시작한다. 이야기 속 법원 또한 대칭이다. 계속해서 쓰인 대칭 구도는 지연이 말하는 트루먼의 세계를 직접 보여주듯 자연스럽지 않은 느낌을 준다. 지연이 던져준 의문은 현식에게서 쉽게 떨어져 나가지 않고, 패스트푸드점에서 일하며 평범하게 살던 현식은 그날 이후 지연과 그 이야기를 계속 곱씹게 된다.
다시 만난 지연은 문성이라는 낯선 남자와 함께다. 이미 머릿속이 지연으로 가득 차 있는 현식은 타이밍 좋게 에러를 경험하게 되고, 자신 또한 트루먼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이후 셋이 함께하게 되면서 그 가운데 사랑이 던져진다. 이들은 서로를 믿지 못하고 의심한다. 세계를 불신하는 세 사람의 만남에서 무엇 하나 쉽게 믿지 못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하다. 무엇이 진짜인지 가짜인지는 확신할 수 없어도, 솔직해질 수는 있다. 영화 속 인물들은 어둠 속에서만큼은 솔직해진다. 얼굴을 숨긴 그들은 두려움을 토로하고 자신의 진실한 모습을 밝힌다.
에러가 발생하면 흘러나오는 어딘가 기괴한, 기계적인 영어 방송. 같은 행동을 반복하는 자아가 사라진 사람들의 오싹한 모습. 관객을 놀라게 할 만큼 큰 ‘탁’ 소리로 에러를 끝내는 것까지 흥미진진한 요소들로 가득하던 전반부와는 다른 분위기의 후반부가 진행된다. 영화 속 세상을 구성하던 재미있는 연출들은 사라지고, 인물들의 대사가 많은 분량을 차지한다. 주로 문성이 소속된 모임 멤버들과의 대화를 듣게 되는데, 대체로 예술, 철학, 정치 등에 대해 뭔가를 뻗대는 듯한 말들이 오간다. 그 모든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그전까지 보고 있던 새롭고 흥미로운 영화의 모습이 점점 흐려진다.
<트루먼의 사랑>은 김덕중 감독이 사랑에 대한 너무 많은 생각과 깊은 고뇌를 결국 정리하지 못하고 내놓은 듯한 영화다. 감독의 욕심이었는지 의도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두 시간 반을 따라가야만 하는 관객의 입장에서 우리는 그 모든 내용을 소화하지 못하고 체하게 된다. 하지만 맛은 나쁘지 않았고, 먹는 동안 꽤 즐거웠던 것도 사실이기에 감독의 다음 작품을 기대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