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평론단 - 비전
극단적인 비유일지도 모르지만, 대한민국의 학교들은 마치 가축을 키우는 닭장 같다. 모두 같은 교복을 입은 학생들에게는 다양한 개성이 허락되지 않는다. 그들은 매일 같은 급식을 먹고 같은 공부를 하며, 학교는 개개인의 등급을 매긴다. 그 안에 갇힌 학생들은 더 넓은 들판을 보지 못한다. 대학이라는 하나의 목표만을 바라보며 졸업을 기다릴 뿐이다. 영화 <산양들>은 이 안에서 특출난 닭이나 병든 닭, 닭장이라는 환경 자체의 문제 같은 것들에 주목하지 않는다. 대신 닭장을 뚫고 이곳저곳을 뛰어다니는 산양들의 이야기를 한다.
고등학교 3학년인 인혜, 서희, 정애, 수민은 미래 계획을 적어 오라는 숙제에 답하지 못하고 백지를 낸 학생들이다. 이들을 데려오라는 선생님의 지시를 받은 서희가 사육장에서 동물들을 돌보는 인혜에게 다가오고, 함께 나머지 친구들을 한 명 한 명 모은다. 이때 나오는 발랄하면서도 비장한 음악은 이 영화가 어떤 작품인지를 그 어떤 수단보다도 잘 소개해 준다. 그렇게 모인 네 명은 함께하게 된 계기와는 전혀 다른 일을 벌인다. 바로 학교 밖 산속에 자신들만의 쉘터를 만들고, 학교 내 철거 위기의 사육장 속 동물들을 구출해 내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넷은 여러 갈등에 부딪힌다. 각자의 개인적인 문제이기도 하고, 쉘터와 동물에 관한 문제이기도 하다. 이를 해결해 나가는 방법들이 어떻게 보면 현실성 없어 보이고 쉽게 납득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꼼꼼한 현실 고증을 대신하는 일관성 있는 유머가 영화의 리듬을 잘 만들어내어 보는 내내 즐거움을 잃지 않게 한다.
고증 부분에서 감탄할 만한 부분이 따로 있다. 이미 성인이 되어버린 감독이 고등학생을 다루는 영화를 만들 때, 그 속의 캐릭터는 ‘어른의 시선에서 바라본 학생’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그래서 우리는 매체 속 과하게 거친 대사나 요즘엔 쓰지 않는 ‘요즘’ 말투를 쓰는 어색한 학생들을 많이 보곤 한다. 특히 남성 감독이 그려낸 여고생이라면 더더욱 염려된다. 하지만 <산양들>에서 유재욱 감독은 놀라울 만큼 과장이나 왜곡 없는, 주변에 꼭 있을 것만 같은 고등학생들을 담아냈다. 그중에서도 잘 다뤄지지 않는 하위권 학생들의 이야기를 풀어내며 동물권에 대한 목소리까지 전달하고 있다.
영화가 마무리 되어갈 때쯤, 네 명의 친구들 중 인혜를 제외한 모두는 나름의 졸업 후 계획이 생긴다. 하지만 인혜는 아직 아무런 계획이 없다. 영화 속에선 얼렁뚱땅 어떻게든 넘어왔지만, 졸업 후엔 학창 시절보다 더 험난할 나날들이 기다리고 있다.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그저 해맑게 노래하는 모습을 보면 어딘가 답답해지기도 한다. 하지만 괜찮지 않은가? 이렇다 할 계획이 없을지라도 이 산양은 분명 1등급 닭만큼이나 혹은 훨씬 더 잘 생존해 낼 것이다. 견인되는 차와 함께 점점 멀어지는 그들을 보고 있으면, 그런 믿음이 피어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