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평론단 - 비전
최승우 감독의 <겨울날들>은 우리에게 익숙한 영화의 문법을 해체하고, 시(詩) 또는 회화(繪畫)에 가까운 본질적인 리듬으로 채워 넣는 과감한 실험이다. 영화 시작부터 캄캄한 화면을 보여주고, 해도 뜨지 않은 이른 시각부터 해체 공사에 몰두하는 인부들의 작업 현장을 비춰주는 건 무척 상징적인 선언이다. 감독이 GV에서 밝혔듯, 이 영화는 굳이 정교한 이야기 구조를 갖추지 않더라도 영화가 본질만으로 충분히 독립된 예술 작품으로 성립할 수 있음을 입증하려는 선언처럼 느껴진다. 관객은 서사를 따라가는 대신, 화면에 흐르는 시간과 움직임을 마치 미술 작품을 감상하듯 목격하게 된다.
영화는 서울의 겨울을 배경으로, 대사 한 줄 없이 특정 배역을 연기해야 했던 배우들의 몸짓과 표정에 집중하며 그들의 일상을 잔잔하게 훑는다. 카메라는 멈추지 않고 도시의 좁은 골목과 계단을 오르내리는 인물들을 따라간다. 이때 그들의 발걸음은 일상 속으로 깊숙이 스며들수록 묘하게 무거워지는 듯한 리듬감을 형성한다. 이 발걸음은 단순한 이동이 아니라, 매일 반복되는 삶의 순환 속에 차츰 쌓여가는 시간의 무게, 혹은 그 흐름 속으로 잠겨 드는 우리 모습을 은유한다.
감독은 의도적으로 서울역이나 남산타워와 같은 도시의 대표적인 상징 공간을 주무대로 삼지는 않는다. 이런 장소는 아주 짧게 삽입되어 이 도시가 서울이라는 것을 알려준다. 대신 인적이 드문 평범한 주거 공간의 풍경을 정지된 프레임 속에 담아낸다. 특히 '창'을 활용한 이미지는 이 영화의 핵심을 관통한다. 창밖으로 폐나무 자재가 위층에서 떨어지는 순간과 한강을 건너는 지하철의 흐름은 통제된 프레임 안에서 비로소 의미를 부여받는 일상의 우연한 사건들이다. 창은 바깥의 무질서하고 무의미한 풍경을 예술적인 이미지로 전환하는 스크린이 되며, 이는 곧 영화 자체가 “보는 것만으로 이루어지는” 명상의 과정임을 강조한다.
배우들에게 대사 없이 감정을 표현해야 했던 도전은, 관객에게 “내 삶은 어떻게, 무엇으로 이루어지는가?”에 대한 질문으로 되돌아온다. GV에서 감독은 이 영화가 일상을 되새기고 시간을 목격하게 함으로써 '영화를 넘은 영화'가 되기를 바랐다고 언급했다. 실제로 <겨울날들>은 관람 후에도 반복, 순환, 그리고 그 속의 미묘한 차이라는 세 가지 키워드를 관객의 마음에 심어 놓는다. 매일 똑같이 흐르는 시간 속에서 아주 미세하게 달라지는 균열을 포착하는 카메라의 시선은, 우리가 무심히 흘려보낸 자신의 삶을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 고찰하도록 이끈다.
<겨울날들>은 이야기의 부재를 감각과 리듬의 충만함으로 보상하는 훌륭한 형식 실험이다. 단지 이야기를 소비하는 것을 넘어, '시간을 목격하는 영화'라는 감독의 의도는 성공적으로 구현되었다. 이 영화는 관객에게 도시의 춥고 메마른 겨울 풍경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삶의 본질적인 아름다움, 그리고 그 안에서 끊임없이 반복되지만, 절대 동일하지 않은 일상의 마법을 제시하는 귀한 경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