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영작 리뷰

시민평론단

<누마카게 시립 수영장> : 입장 가이드

By 조효정

여러분이 다음과 같은 사항에 해당하는 경험이 하나라도 있다면 오타 신고 감독의 영화 <누마카게 시립 수영장>을 이용할 충분한 자격이 있으니 바로 입장하자. 하나. 무생물에 이름을 붙여보았다. 하나. 한 장소를 꾸준히 이용한 적 있다. 하나. 같은 직장을 오래 다녔다. 하나. 사랑하는 누군가를 떠나보낸 경험이 있다. 물론 해당 사항이 없어도 입장이 가능하다. 제한 사항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권고 사항일 뿐이다.

 

바다가 없는 도시 사이타마에서 52년 동안 시민들의 여름 놀이터였던 누마카게 시립 수영장의 철거가 결정됐다. 도시 개발의 명목으로 각종 건물을 부수고 새로 짓는 일이 흔해진 요즘이지만 오랫동안 자리를 지키던 무언가를 떠나보내는 일은 그 존재가 생물이든 무생물이든 쉬운 일은 아니다. 시간은 그 자체로 강력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노화하고 건물은 노후한다. 물리적으로 모든 것을 낡게 만드는 것이 바로 시간이다. 물리적인 힘에 더해 세월 속에 켜켜이 쌓인 정서적 무게와 깊이 또한 거스를 수 없는 설득력을 지닌다. 그래서 건물 하나 사라지는 일이 대수냐고 묻는 사람들을 향해 오타 신고 감독은 이곳을 보라고 이 사람들을 좀 보라고 말한다. 친구를 소개하듯 수영장 곳곳을 애정 넘치는 시선으로 비추고 수영장에 대한 사랑을 열렬히 고백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독특한 구성과 신선한 기획으로 담아낸다.

 

수영장을 기록하기 위해 영화는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의 죽음의 5단계라는 개념을 빌려온다. 각 단계에 해당하는 부정-분노-협상-우울-수용으로 장을 구성했다. 그렇다. 이것은 철거가 아니라 죽음이다. 영화는 오프닝부터 최후의 순간을 보여준다. 중장비가 수영장 콘크리트를 부수는 모습을 한참 비추며 시작한다. 죽음은 이미 예정되었다. 이제 남은 과제는 어떻게 잘 떠나보내느냐다.

 

곧이어 수영장 내부로 옮겨간 카메라가 탈의실로 향한다. 탈의실을 천천히 훑는 동안 몇몇 캐비닛 문이 저절로 툭툭 열리고 닫히기를 반복하는 신비로운 장면이 펼쳐진다. 마치 심폐소생술로 다시 뛰게 만든 심장 박동처럼 들썩이는 캐비닛 연출은 공간에 숨결을 불어 넣는다. 그리고 과거로 되돌려 화면 왼쪽 아래에 철거가 예정된 기한을 자막으로 띄운다. ‘철거 D-49’가 아니라 여명(餘命) 49이라고 뜨는 순간 이 영화에 반해버렸다. 남은 목숨이라니. 발 한 번 담가본 적 없는 수영장이 이상하게도 애잔해졌다. 디데이를 기록하는 단어 선택 하나로 단번에 수영장을 ​사람처럼 탄생부터 죽음까지 희로애락을 겪는 존재로 만든다.

 

영화뿐 아니라 수영장에서 일하는 직원들도 이미 수영장을 사람처럼 대한다. 매일 퇴근 전 오늘도 무사히를 가능하게 한 수영장에 예를 갖춘다. 차렷, 인사. 풀장에 나란히 선 안전 요원들이 꾸벅 고개를 숙인다. ‘죽음의 5단계는 수영장 입장에서 자기 죽음을 받아들이는 과정이기도 하지만 직원과 이용객들로서도 수영장 철거라는 하나의 사건을 받아들이는 과정이다.

 

철거 장면이 다시 등장한다. 시멘트 계단이 뜯겨나가고 철근이 불쑥 드러나는 순간, 마치 살점이 찢기는 듯한 고통이 느껴졌다. 오프닝에서 그저 일상적인 작업처럼 보였던 철거가 이제는 상해의 과정처럼 다가온다. 무감하게 지나쳤던 장면들이 새롭게 보이기 시작한다. 수영장에 감정 이입하게 된다니. 이 영화의 마법이다.

 

파랑, 주황, 초록, 노랑 생생한 색감으로 가득한 수영장은 그 자체로 시각적 즐거움이다. 수영장 중앙에 자리한 대형 슬라이드를 포함한 독특한 구조와 버드아이뷰로 드러나는 넓은 규모까지 영화는 장소가 가진 외형적 매력을 다채롭게 포착한다. 또한 다양한 카메라 시선을 활용해 수영장 안팎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일상을 자세히 관찰한다. 나아가 수영장 주변 공간과 그곳에 얽힌 인물들까지 조명함으로써 수영장이 하나의 시설이 아니라 지역 사회와 엮인 살아 있는 장소였음을 보여준다. 이렇게 영화는 공간과 공간 안에 놓인 사람들을 입체적으로 비추며 슬프지만 유쾌한 명랑 수영장 철거기를 완성한다.

 

영화의 마지막, 어느덧 작별의 날이다. 직원들이 낭독하는 편지를 들으며 누마카게 시립 수영장이 왠지 부러워졌다. 이렇게 사랑받고 진심 어린 작별 인사를 받는 존재라니 행복하지 않을. 그 마음에 공감하게 되는 것은 우리 역시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누구도 죽음을 피할 수 없으며 살아있는 한 수많은 공간에서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퇴장하기 전에 나도 인사를 보태고 싶어졌다. 차렷, 인사. 안녕, 누마카게 시립 수영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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