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평론단 - 비전
가족은 종종 구원과 상처라는 상반된 얼굴로 호출된다. 개인주의와 가족주의가 교차하는 지점에서 ‘행복한 가정’이라는 사회적 환상은 여전히 견고하고, 그 환상이 요구하는 책임은 대체로 가족 내부로 수렴된다. <철들 무렵>은 바로 그 지점—한국 사회에서 오랫동안 ‘가족’이 사회적 안전망의 대체물이 되어버린 조건—을 정면으로 응시한다. 영화는 부양의 문제를 가볍게 다루지 않는다. 오히려 부양에 대한 끝없는 협의와 조정이 얽힌 장기전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근현대 한국의 궤적은 사회적 위험을 흡수할 공적 안전망이 빈약했던 시절을 길게 통과했다. 국가가 ‘선 성장, 후 분배’의 기치를 내세우던 동안, 돌봄과 부양, 교육과 의료 같은 삶의 기본 함수는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사실상 외주화되었다. 흥미로운 것은 국가가 필요에 따라 가족을 상반된 표상으로 호명해 왔다는 점이다. 산업화 초기에 핵가족은 근대적 진보의 상징이었으나, 농촌의 공동화와 노령화가 문제가 되자 전통적 가족 부양 윤리가 다시 호출되었다. 공통 분모는 분명하다. 사회 문제의 원인과 해결책을 모두 가족에 귀속시키는 통치의 언어—국가는 비용을 최소화하고, 가족은 책임을 극대화한다.
<철들 무렵>의 미덕은 이 구조를 해설하거나 규탄하지 않는 데 있다. 영화는 설교 대신 지속되는 책임의 현장감을 조용하지만 집요하게 쌓아 올린다. 인물들은 누군가의 희생 서사로 미화되지도, 쿨한 이별로 해방되지도 않는다. 돌봄의 시간표와 병원비, 관계의 균열과 봉합을 둘러싼 미세한 결정들이 쌓여 ‘살아낸다’는 말의 무게를 만든다. 공동체(가족) 안에서 개인의 행복이 가능한가—감독이 자신의 체감에서 끌어올린 이 질문은, 영화 속 어디에서도 손쉬운 답을 얻지 못한다. 그래서 더 설득력 있다.
관계의 결은 ‘느슨한 연대’의 낭만이 아니라 비켜 서기 어려운 의무의 지속에 가깝다. 그 지속은 특정 세대의 특수성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조부모에서 부모, 그리고 자녀 세대로 이어지는 층위가 한 프레임 안에서 공명할 때, 영화는 개인의 사연을 넘어 부양이라는 규범이 세대를 가로질러 이행되는 방식을 드러낸다. 이때 정미가 서 있는 자리—부모의 다른 리듬과 요구 사이를 오가며 관계를 ‘관리’해야 하는 위치—는 오늘의 청년 세대가 체감하는 지연된 자율의 얼굴로 읽힌다. 자율은 부양과 충돌하며, 대개는 늦춰진다.
영화가 제시하는 ‘철 듦’ 또한 상태가 아니라 진행형(ing)의 감각이다. 누군가의 간병을 둘러싼 협의, 퇴로 없는 결정, 사소하지만 무거운 배려가 반복될 때 우리는 다만 ‘철 들 무렵’에 머문다. 제목의 미묘한 시차는 성장의 약속이 아니라 성장이 끝나지 않음을 인정하는 명명이다. 마지막에 동민이 화분에 붙이는 이름은 거창한 희망의 제스처라기보다, 다음 세대의 관찰과 학습이 이미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소박한 징후다. 과거와 현재를 잇는 그 손짓은 처방이 아니라 표지다.
결국 <철들 무렵>이 남기는 것은 해법이 아니라 질문의 자격이다. 한국에서 부양은 아직도 가볍게 다룰 수 없는 의무이며, 그 의무를 개인 덕목으로만 환원하는 한 행복은 늘 유예될 것이다. 영화는 이 사실을 큰 목소리로 외치지 않는다. 대신 현상을 끝까지 보여줌으로써, 관객 각자가 자신의 자리에서 자율과 부양의 균형을 어떻게 재설계할지 사유하게 만든다. 그 사유가 시작되는 지점—바로 거기가 우리가 조금씩, 정말로 조금씩, 철이 들어가는 무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