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평론단
* 약간의 스포일러, 특히 결말부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나에겐 너 같이 날 지켜줄 피가 없어.”
영화의 중반부. 키쿠오는 공연 시작 전 슌스케를 붙잡고 이렇게 말한다. 주체할 수 없는 떨림을 이겨 내고, 수많은 관객 앞에서 완벽한 온나가타가 되어야 하는 키쿠오에게 이런 바람은 자연스럽다 못해 당연할 테다. 하지만 그것이 왜 하필 “피(혈통)”이어야 하는지, 그리고 키쿠오가 그것을 끝까지 갈구하고 원망하던 것을 생각해보자. 궁극적으로 <국보>에서 말하는 아름다움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다시 영화의 초반. 키쿠오는 나가사키의 타치바나 조의 조장 밑에서 태어났다. 폭력적이고 남성적인 이 야쿠자의 세계에서 키쿠오는 온나가타 연기를 훌륭하게 해낸다. 이를 본 가부키 가문의 당주이자 대표 배우인 한지로는 이런 키쿠오의 재능을 높게 산다. 이후 일련의 사건을 거쳐 한지로의 밑으로 들어간 키쿠오는 진정한 온나가타의 길을 걷는다. 성별 중앙에 낀 중성이라고 해야 할 지, 무성이라고 해야 할 지 그 애매한 세계에 본격적으로 편입된다.
한지로의 아들 슌스케와 같이 수련을 하며 가부키 배우로서 성장하는 키쿠오는 종종 “정말 아름다운” 장면을 본다. 검은 배경에 눈인가, 꽃인가 하는 것들이 천천히 하강하며 도리어 정적인 느낌마저 주는 이미지. 이 이미지는 키쿠오가 겪는 불안이나 갈등, 그리고 완주 때마다 등장한다. 키쿠오가 추구하는 어떠한 상像, 나아가 그의 목적과 동일시 된다. <국보>는 키쿠오의 인생 전반을 누비며 그가 아름다움을 찾아가는 일종의 로드 무비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고 <국보>가 단순하게 아름다움을 예찬하고, 그 과정을 아름답게 그리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극 중 핵심 소재인 가부키의 경우, 혈통을 타고 내려와 가업을 잇는다는 의미가 정말 강하다. 슌스케와 키쿠오가 함께 처음 합동공연을 할 때, 핸드헬드로 마치 관객이 가부키 극의 관객이 된 것 같은 체험감을 준다. 여기서 우리는 별안간 둘 사이의 실력 차이를 읽어낼 수는 없다. 가부키의 문법에 능한 사람이 아니라면, 둘의 차이를 독해할 수 없으며 동시에 우리는 둘 중 누가 다음 당주가 될 지 상식적으로 알 수 있다. 바로 슌스케다. 야쿠자의 피를 받은 키쿠오가 아닌, 제대로 된 가부키 극을 소화하는 가문의 슌스케다.
때문에 이 혈통을 가지지 못한 키쿠오는 핍박과 끝없는 증명을 해내야 한다. 이제 그의 눈에 들어오는 것은 온나가타가 주는 아름다움이 아니라, 하나이 한지로를 이을 수 있다는 납득이다. 이 지난한 과정에서 카메라는 키쿠오의 정면이 아닌 사선이나 옆면에서 그를 잡는다. 특히 키쿠오의 울분과 분노가 느껴지는 씬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도 내가 어딜 보고 있는 지 모르겠어.”
끝내 키쿠오는 “국보”가 되는데 성공하지만, 그런 그를 찾아오는 것은 사생딸이다. 그는 원망 섞인 말로 이렇게 물어본다. “당신이 그 아름다움을 갖기 위해 도대체 몇명이나 희생을 시킨 것인가요?” 그리고 다시. 그는 이렇게 덧붙인다. “하지만 당신의 그 연극은 … 정말 아름답더라고요.” 키쿠오가 온나가타로서 국보가 되어 가부키의 아름다움을 세상에 전파하는데 성공하지만, 한 개인으로서 다른 개인을 구원하는데는 철저히 실패한 것이다. 오히려 누군가를 망가뜨리고, 누군가를 파멸시켜버린 결과를 초래했다.
국보가 되어 춤사위를 펼친 키쿠오가 극을 마치자, 그가 그토록 평생을 좇던 이미지가 그의 눈 앞에 드러난다. 우수에 찬 표정으로 그는 회환일지, 아니면 충만함일지 모를 표정을 짓는다. 그리고 그는 나직하게 말을 읊는다.
“정말이지 아름다운 장면이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