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평론단 - 비전
재능과 노력, 둘 중 하나를 준다고 한다면 당연하게도 재능을 선택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노력은 누군가에게 받지 않아도, 내가 해낼 수 있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재능은 노력으로 불가능한 영역이기에, 합리적으로 재능을 선택하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재능은 탐나는 것이다. 재능이 사실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옮겨 다니는 것이라면 어떨까. 아무래도 이 <아코디언 도어>는 그러한 의문 속에서 시작된 듯하다. 과연 <아코디언 도어>의 제목은 재능과 무슨 연관이 있고, 재능이 어떻게 영화 속을 떠돌아다니는지 눈으로 좇아가 보자.
지수(문우진)는 글쓰기에 재능이 있는 학생이다. 사실 처음부터 재능이 있진 않았다. 어린 시절 부모님과 떠난 과학 체험관, 요란한 부부싸움으로부터 달아난 지수가 아코디언 도어 뒤에 숨은 후 벌어진 끔찍한 일 이후 재능이 개화했다. 한마디로 <아코디언 도어>는 재능의 시발이다. 재능은 징그러운 기생충의 형태로 꾸물꾸물 지수의 몸에 잠입한다, 아니 지수는 그리 믿는다. 하나 없던 지수에게 글쓰기는 귀한 재능이다. 타박만 일삼던 엄마는 이제 지수를 '작가님'이라 대하며 '대접'한다는 것만 봐도 그러하다.
처음 등장한 전국 백일장 대회에서 지수는 지우개로 글을 지운다. 글을 지울 때, 들리는 파도의 소리는 칠판 속 글제와 자연스레 이어진다. 파도가 지나간 백사장처럼, 흔적이 남는다. 공교롭게도 '어차피 평범해질 운명이었다'라는 문장만 남는다. 재능을 가진 사람이 끊임없이 고뇌하다 강박처럼 내뱉은 문장처럼, 무게감이 있다. 훗날의 복선이라도 되는 듯 긴장감이 스크린을 장악한다.
귀한 글쓰기 재능은 지수가 물에 빠진 후 꾸물꾸물 축구를 좋아하는 전학생 현주(이재인)에게로 옮겨 간다. 재능이 기생충처럼 이동이라도 하는지, 그 이후 전국 백일장 대회에서 지수는 글을 제대로 쓰지 못한다. 지수는 기침을 콜록대며 앓을 뿐이다. 더 이상 '작가님'이 아니게 된 지수는 빼앗긴 재능을 되찾기라도 하려는 듯 강박적으로 현주에게 따라붙는다. 이러한 집요한 쫓음은 사회적 징벌로 중단된다. 훗날 재회하지만 지수는 글쓰기를 그만두었고, 현주는 축구를 계속하지만 유망해 보이진 않는다.
귀한 재능께서 나에게서 달아나면, 어차피 평범해질 운명이었던 걸까? 그렇다면 재능은 누구의 것인가. 세상을 부유하다 갑작스레 왔다, 갑작스레 떠나는 재능은 누구의 것인가. 영화는 해답을 우리에게 주지 않는다. 다만 우리가 얼마나 재능에 집착하며 사는지 알려준다. 그러나 그 방식은 결코 친절하지 않다. 거북하고 과한 자극이라는 수단을 활용하기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도 앞에 꼿꼿하게 선 사내(고경표)처럼. 재능에 집착하는 아이들도 끝내는 성장하고 만다는 가치를 넌지시 제시하기에, <아코디언 도어>는 본질만큼은 분명하게 전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