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영작 리뷰

시민평론단 - 비전

<철들 무렵> : 나란한 고군분투

By 서은교

 

 

  어느 가족의 이야기라기엔 가족 구성원이 죄다 1인 가구다. 정미(하윤경)를 중심으로 한 엄마 현숙(양말복)과 아빠 철택(기주봉)의 이야기라기엔 두 사람은 사실상 이혼 상태에 있다. 좋다, 그렇다면 핵가족이란 표현도 채 포섭하기 못하는 요즘의 파편적 생활공동체를 포착했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영화에 등장하는 친척 가족들은 또 어찌나 많은지. 영화 <철들 무렵>(정승오, 2025)은 좀처럼 모여들지 않고 흩어지면서도 가족이란 외피 아래에서 고군분투하는 이 시대의 면면을 재치있게 담아낸다.

 

 

  아쉬운 소리 듣지 않고 평범하게 살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물론 정미의 가족은 입 댈 구석이 많다. 가족 모두 1인으로 구성된 각자의 가정을 꾸리고 있는 것에서 약간의 정상성이 보장되지만, 독립적인 각자의 열심은 철택이 암 말기 판정을 받으면서 비로소, 혹은 다시 한번 엉겨 붙으며 흔들리기 시작한다. 

 

 

  어떻게 보면 말기 암이라는 장치는 가족 서사 진행에 있어 어떻게 기능할지 쉽게 예상된다. 평소 서로에 대해 딱히 생각해 보지 않고 살아가다가 암 판정이라는 소식에 가족이 전부 영향받으며 서로의 소중함을 곱씹게 되는 이야기. 이는 무리 없이 줄거리에 안정감을 가져오는 동시에 딱 그만큼 진부해질 수 있는 위험성이 있다. 그러나 <철들 무렵>은 인물의 내면으로 침잠하는 대신 가족의 범위를 넓게 두며 이를 재치있게 타파한다.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영화가 옥남(원미원)을 주목한다는 점이다. 중심인물인 정미를 두고 옥남을 바라보면 옥남은 정미의 외조모지만, 실상 영화에서 두 사람이 동시에 등장하는 장면은 없다. 즉, 영화는 옥남을 누군가의 어머니 대신 다른 이와 다를 바 없이 시대를 통과하는 '한 사람'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홀로 사는 그녀가 노인 센터에 나가 각종 활동을 하고 셔틀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장면은 옥남이 어렸을 때부터 직접 경험한 한국 근현대사를 설명하는 내레이션과 병치된다. 이어지는 옥남의 내레이션은 또한 현택의 말기 암 판정이 동심원이 되어 가족들에게 파장이 번지는 풍경에 덧씌워지기도 한다. 그러니까 <철들 무렵>은 각자의 고됨을 고루 담으며 우선순위나 중요도 따위를 매기지 않고, 나란히 뻗어가는 개개인의 삶을 가족이라는 한 폭의 그림에 담아 유연하게 어루만지고 있는 것이다.

 

 

  여러 단계로 쪼개지어다 못해 디테일까지 요구되는 현대인의 삶 속에서 내 한 몸 챙기기에도 충분히 버겁다는 속내를 영화는 담담히 수용한다. 아야 아야, 소리내어 엄살을 부려도 좋고, 네 탓과 내 탓의 무게를 재며 책임을 떠넘겨도 좋다. 어쩌면 매너나 체면은 때려치우고 서로 쌍욕을 퍼부어도 괜찮을 것이다. <철들 무렵>은 돌봄 노동과 사회적 역할의 수행에 염증이 터져버린 개개인을 너그럽게 끌어안는 방식으로 정상성 대신 진정성을 끌어올린다. 그렇게 고전적 의미의 화합이 사라진 자리에 우스꽝스러운 유머와 장난이 피어오르고, 내밀함은 깊어진다. 현택은 정미와 한바탕 소동을 벌이고 나서야, 정미는 현숙에게 영 껄끄럽던 돈 얘기를 꺼내고 나서야, 그리고 그리고 현숙은 현택과의 사실상 이혼을 법적 이혼으로 마무리 짓고 나서야 각자의 사정과 심정을 어렴풋 공유한다. 아무래도 친밀함이란 관계의 형식이나 구조적 이름으로부터 부여되는 것은 아닌 것만 같다. 

 

 

  처녀귀신을 연기했던 자신의 모습이 악몽의 한 장면이 되어 정미에게 나타났던 것처럼, 낮이고 밤이고 꿈에서고 언제 끝날지 모를 것 같은 시간이 모두에게나 있다. 그리고 모든 게 지긋지긋함으로 치밀어 오르는 그 시간은 타인의 승인없이 스스로에게 안녕을 보내는 방식으로 종료되기 마련이다. 아마도 그 때를, 철들 무렵이라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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