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평론단 - 비전
<두 번째 아이>에 대해서는 가능한 한 사전 정보를 접하지 않은 채 마주하는 편이 낫다. 이야기의 뼈대나 장르적 설정을 미리 알고 있으면 영화가 유도하는 긴장과 혼란을 온전히 체험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미스터리와 공포라는 장르가 작동하는 방식은 언제나 알려지지 않은 것, 밝혀지지 않은 것이 얼마나 길게 지속되느냐에 달려 있다. 따라서 이 영화는 관객이 “존재에 관해 처음 마주하는 경험”을 적극적으로 조직하고 있으며 그것을 감각하게 만드는 순간들, 다시 말해 <두 번째 아이>라는 제목과 달리 영화가 드러내는 것은 언제나 반복될 수 없는 늘 처음으로서의 존재의 유일성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장르의 선택은 이 작품의 핵심적인 미학으로 자리 잡는다. 감독의 확고한 태도이자 자신감으로 읽힌다. <두 번째 아이>는 가족 내부의 파국적 사건을 단순한 멜로드라마나 리얼한 가족극의 형식이 아닌 불확실성과 불안의 감각을 극대화하는 미스터리·공포 장르를 택했다. 이는 관객이 서사적 해명을 통해 안도하는 대신, 끝내 해소되지 않는 긴장 속에서 상실의 본질을 체험하도록 이끈다.
<두 번째 아이>는 무엇보다 관객의 자리를 교묘하게 흔들어 놓는 방식을 택한다. 영화는 단서를 제시하면서도 확증을 내놓지 않음으로써, 관객이 사건을 해석하려는 욕망 자체를 불안하게 만든다. 이는 단순한 ‘서사의 공백’이 아니라, 관객이 스스로 해명할 수 없는 자리에 오래 머물도록 강제하는 장치다. 다시 말해, 이 영화는 서사적 진실을 향한 기대를 끝내 좌절시키며, 관객을 상실의 체험자이자 불확실한 존재의 증인으로 만든다.
또한 도플갱어의 등장은 장르적 장치 이상의 의미를 획득한다. 그것은 단순히 죽은 자의 귀환이 아니라, 한 존재가 둘로 갈라져 나타나는 경험, 즉 정체성이 결코 단일하지 않음을 보여주는 사건이다. 이 불가해한 현상은 금옥의 내면뿐 아니라 관객의 정체성 인식에도 균열을 일으킨다. ‘두 번째’라는 수사가 암시하는 반복 가능성은, 사실상 언제나 처음이자 다시는 반복될 수 없는 ‘유일성’의 역설로 귀결된다.
무엇보다 이 영화에서 주목할 만한 지점은 은폐된 한국 사회의 무거운 정동을 공포와 미스터리의 언어로 꺼내 놓았다는 사실이다. 예컨대 죽은 줄 알았던 딸 수련과 꼭 닮은 재인의 등장은 단순한 반전의 장치가 아니라 이미 봉합된 듯 감춰져 있던 기억과 정서를 다시금 갈라내며 상처의 심연을 드러내는 충격으로 다가온다. 재인의 등장은 멜로드라마가 제공할 법한 위로와 해명의 언어로 환원되지 않는다. 그녀는 단숨에 금옥 앞에 복귀한 존재가 아니며, 끝내 진실이 무엇인지 밝혀주지 못한다.
이 불편한 진실이야말로 <두 번째 아이>가 구축한 독자적 위치이며, 동시대 한국영화 속에서도 눈여겨볼 만한 성취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영화는 가족 내 상처, 상실, 죄책감, 모성과 같은 무거운 정서를 단지 ‘감정적 고통’으로 소비하지 않고 장르적 긴장으로 전환시킨다. 사회적 금기나 비밀처럼 작동해 온 ‘말해지지 못한 것들’을 공포의 언어로 꺼내 놓는 순간, 영화는 단순한 공포체험 이상의 윤리적 경험을 구성한다.
더욱이 이 작품은 시공간을 유연하게 뒤틀며 관객의 시선을 통제한다. 플래시백과 지금-여기의 전환, 시선의 교차, 기억의 착종이 뒤섞인 편집은 관객이 언제 ‘실제’에 머무르고 있는지 혼란스럽게 만든다. 이 혼돈이야말로 영화가 구축한 불안의 구조이며, 진실과 거짓, 기억과 망각, 존재와 허구 사이의 경계를 흐린다. 이 지점에서 상실한 존재와 존재의 자취 그리고 남은 자들의 기억은 위로보다는 불안을 해명 대신 질문을 던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