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영작 리뷰

시민평론단 - 비전

<단잠> : 영원한 상처 바라보기, 관찰자의 시점으로

By 김예은

 자살은 그 이름조차 함구하게끔 만든다. 뉴스나 신문에서는 자살이라는 말이 부정적이라 하여 '극단적 선택'이라 에둘러 말하지만, 그것이 자살이 아님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알면서도 사람들은 함구하는 것이다. 그만큼 조심스럽고 예민한 주제이다. 떠난 사람에 대한 안타까움은 잠시다. 이미 떠나서 돌아오지 못할 걸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가족들은 떠나지도 않았기에 더욱 안타깝다. 자살 유가족의 처한 현실에 대해 잘 알지는 못해도, 적어도 험난할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다. <단잠>은 그를 어떻게 구체적으로 담았을까. 그리고 <단잠>의 의미는 어떤 것일까. 한 번 알아보자.

 

 두 사람이 있다. 인선(이지현)은 남편을 잃었고, 수연(홍승희)은 아빠를 잃었다. 인선과 수연은 모녀지간이다. 상실의 고통을 함께 나눈 두 사람은 연대할 것만 같지만 거리가 느껴진다. 부모와 상의 후 결정할 일조차 수연은 독단적으로 선택한다. 상의가 무용한 일이라고 생각하기라도 하는 듯이. 스크린 속에서 모녀가 나란히 있는 모습조차도 어색하다. 불편함은 삐걱거리는 관계 속에서 고스란히 전달된다. 죽은 자의 유해를 두고 다른 태도를 보이는 두 사람의 갈등은 충분히 이해된다. 당사자가 아니면 빠지라는 듯, 감히 말을 얹을 수도 없다. 시종일관 무거운 공기가 어두운 톤이 스크린을 장악한다.

 

 평범했던 그들이 자살 유가족이 된 후 삶은 급속도로 변화한다. 그리고 그 변화의 시점은 멈춰버린 남편이자 아빠의 유품인 시계로 나타난다. 죽음 이후 3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유해를 정리하지 못했듯 인선과 수연의 시간은 시계 속 시간에 정지되어 있다. 자살 유가족에게는 죄가 없지만, 그들은 이미 죄인이다. 경사의 불청객이요, 무조건적인 배려의 대상이다. 남들의 눈치도 봐야 하는데, 남들이 보는 눈치에 몸을 사려야 한다. 값싼 동정과 연민은 그들을 자극해 예민하게 만든다. 그 과정은 처절한 연기와 리얼리즘으로 가득한 상황으로 끊임없이 모습을 드러낸다.

 

 과거의 평온했던 삶으로 돌아가기 위해 이들은 발버둥 친다. 자살 유가족 모임에 참여하고, 유해를 정리하고자 한다. 그러나 실패한다. 게다가 자살 유가족의 수는 적지 않아서, 실패의 갈래도 여기저기 서럽게도 뻗어나간다. 감정을 억누르고, 슬픔을 참고, 고통을 견뎌도 능사는 아니다. 결국 터져버리고 만다. 그 순간을 감내해야 하는 것은 오롯이 그들뿐이다.

 

  <단잠>은 유가족들이 이제 영원히 가지지 못할 평온함이다. 회복을 논할 수 없고, 극복을 주제넘게 언급하기에는 영원한 상처다. 그렇기에 넌지시 진정 내지는 완화의 가능성을 제시할 뿐이다. 우리는 철저히 관찰자의 시점으로 영원한 상처를 입은 자들을 바라본다. 그저 바라보며, 하염없이 안타까워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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