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영작 리뷰

시민평론단 - 비전

<흐르는 여정> : 타인의 목소리로 흐르는

By 황준성
<흐르는 여정>에서 가장 인상 깊은 것은 춘희의 이야기가 민준의 목소리로 흘러나오는 내레이션이다. 달리 말하자면, 관객은 영화의 시작부터 묘한 이질감을 느낀다. 카메라는 분명 춘희의 얼굴을 비추지만, 관객의 귀에는 젊은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오기 때문이다. 이 시청각의 어긋남은 곧 그녀의 기억이 타인의 목소리를 통해 재현되는 과정을 드러내며, 깊은 인상을 남긴다.

 

흥미로운 것은 이 장치가 본격적인 서사가 시작되기 전부터 사용된다는 점이다. 다시 말하자면, 관객은 인물의 배경을 충분히 알지 못한 상태에서 남성의 목소리로 여성의 삶이 열리는 순간을 맞이한다. 시각과 청각의 분리는 긴장감을 자아내며, 동시에 '춘희의 삶은 타인의 목소리를 통해 새로운 여정을 맞는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영화의 서두에서부터 이 연출은 탁월하고 인상적이다.

또한, 이 장치가 설득력을 갖는 이유는 먼저 떠난 춘희의 남편이 청각장애인으로 말을 하지 못했던 인물이라는 점과 연결되기 때문이다. 목소리 없는 남편 곁에서 평생을 살아온 춘희는 결국 ‘부재한 음성’의 세계를 살아왔다. 그런데 남편의 죽음 이후, 그녀의 삶은 이웃사촌이자 아들 같은 민준의 목소리를 통해 발화된다. 말을 잃은 첫 번째 남자와 목소리를 빌려주는 두 번째 남자의 대비는 상실과 계승을 동시에 상징한다.

 

입양아 출신 민준의 한국어는 서툴고 어눌하다. 그러나 그 불완전한 발화가 춘희의 기억을 더 선명하게 만든다. 고통과 그리움은 원래 다듬어진 언어보다는, 서툰 억양에서 묻어나는 떨림이 더 깊은 진실을 전한다. 춘희가 직접 말하지 않고, 남편도 끝내 하지 못했던 이야기가 민준의 목소리로 전해질 때, 그 기억은 더 이상 한 사람의 기억이 아니라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 감각으로 확장된다.

여기에 민준의​ 제자 성찬의 피아노가 더해진다. 성찬이 두드리는 건반 소리는 춘희가 남편과 함께 맞이하지 못한 미래를 환기한다. 남편이 생전에 들을 수 없었던 피아노 소리, 함께 누리지 못했던 음악이 성찬의 연주를 통해 현실 속에 울려 퍼진다. 이때 피아노 소리는 단순한 배경음이 아니라, 춘희가 떠나 보낸 과거와 다가오는 미래를 동시에 감각하게 만드는 매개다. 남편과 성찬의 대비는 바로 이 지점에서 극명 해진다. 소리를 가질 수 없었던 한 남자와, 소리로 자신을 표현하는 한 소년 사이에서 춘희는 자신이 잃은 것과 여전히 이어질 수 있는 것을 동시에 느낀다.

민준과 성찬은 결국 춘희의 남편이 남기지 못한 것을 서로 나누어 계승한다. 민준의 목소리는 말하지 못한 감정을 대신 전하고, 성찬의 피아노는 듣지 못한 소리를 대신 들려준다. 이 둘의 존재는 춘희의 슬픔을 단순히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남편의 부재가 남긴 공백을 다른 방식으로 울려 퍼지게 한다. 그렇기에 그녀의 감정은 단순한 애도가 아니라, 새로운 관계 속에서 변주되는 재생의 감정으로 나아간다.

 

<흐르는 여정>은 시각과 청각, 얼굴과 목소리의 분리를 통해 삶의 불완전성과 애도의 방식을 드러낸다. 춘희가 직접 그녀의 비밀을 말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오히려 더 큰 진실을 전한다. 영화에서 춘희의 기억과 감정은 타인의 목소리를 거쳐야 말이 된다. 민준의 내레이션은 그 과정을 형상화하며, 관객에게 강렬한 감동을 남긴다.

결국, 이 영화의 우아함은 목소리의 선택에서 비롯된다. 특히, 마지막에 흐르는 피아노 연주와 내레이션의 결합은 이 모든 의미를 감각적 울림으로 끌어올린다. 말과 음이 겹쳐지는 순간, 상실의 이야기는 단순한 슬픔을 넘어 깊은 감동으로 변주된다. 그래서 <흐르는 여정>의 내레이션은 효과적인 연출을 넘어선다. 타인의 목소리와 음악을 통해, 멈춘 듯했던 삶이 다시 흐를 수 있는 가능성을 드러내며 하나의 찬란한 순간을 완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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