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평론단 - 비전
사별은 언제나 괴로움을 수반한다. 그도 그럴 것이, 더 이상 만날 수 없다는 체념과 후회가 범벅이 되어버리는데 오히려 그러지 않는다고 믿는 쪽이 더 불합리하다. 오죽하면 단장斷腸의 고통이라는 표현까지 나오겠는가. 더군다나 그것이 스스로 선택한 죽음과 이별이라면, 단순히 표현이 아니라 정말로 장기가 끊어지는 고통을 느낄 것이다.
<단잠>은 수연의 아버지이자 인선의 남편이었던 사람이 자살한 뒤 3년이 지난 일상을 보여준다. 수연은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고, 인선은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하며 과일을 산다. 얼핏 보면 그들의 일상이 아주 조금은 회복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 남자의 유골은 여전히 집에 있고, 그의 얘기를 소화하는데 두 모녀는 여전히 버겁다. 설상가상 주변 인물들은 그들을 “특별”하게 취급하며 자신들의 이해와 사정만 쏟아내는데 여념없다.
이런 상황 속에서, 영화는 조용히 두 모녀의 행적을 쫓는다. 격정적인 씬을 배치하거나 특정 풍경이나 장면을 사건화하지도 않는다. 다만 그들의 감정을 온전히 느낄 수 있게 카메라를 배치할 뿐이다. 요컨대 달리 인으로 다툼을 잡는다든지, 수현의 얼굴을 극단적으로 클로즈업하여 어딘가 공허해보이는 안광을 보여준다든지. 어설프게 위로하려 들거나 감정적 격양을 통해 상황을 극적으로 만들지 않는다. 남겨진 사람들이 겪는 일들을 건조하게 보여줄 뿐이다.
대신 과거와 환상을 혼재시켜 모녀의 입으로 남겨진 이들의 목소리를 들려준다. 남자는 종종 수연과 인선의 옆에 등장한다. 그들과 대화를 하며 심지어 지나가는 행인과도 얘기한다. 그래서 보는 이로 하여금 이것이 과거에 있었던 일을 회상하는 것인지, 아니면 수연과 인선의 환상 속에서 남자가 말을 건네는 것인지 명확하게 구분해내기 어렵다. 단, 그들이 자신들을 떠난 남자에게, 또 영화를 보는 관객에게 어떤 것을 얘기하고 싶은지는 명확하다. 그리고 이는 극의 맨처음 수연이 친구 아버지의 장례식장에서 가지 않은 이유를 설명하는 씬과 겹쳐진다. “네가 이해해주면 안 될까?”
함부로 연민하지도 말고, 함부로 위로하지도 말라. 단, 그 사람 옆에서 조용히 자리를 지켜 있어주는 것이 진정한 애도가 아닐까 이광국 감독은 영화를 통해 말한다. 이를 방증하듯 영화는 사건의 주변부를 맴돌며 계속해서 배회한다. 중심을 향해 직선적으로 달려가는 사건중심적인 영화가 아니라, 영화 속에 남겨진 인물들을 찬찬히 어루만지는 관찰 일지와 비슷하다. 보는 이로 하여금, 또한 내재된 인물들로 하여금 존중과 조그마한 토닥임을 건네는 일일 테다.
애도는 해당 주체의 일상 회복성을 암시한다. 이는 곧 끝끝내 애도가 결핍되어야 애도가 완성된다는 말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전까진 공생 관계가 지속된다는 말이기도 하다. 마치 수연과 인선에게 말을 건네는 그 남자처럼, 그리고 끝끝내 마지막에 이르러서 등장하지 않는 그 남자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