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평론단 - 비전
흔히 우정은 또래와 나누는 것으로 생각한다. 대체로 이러한 생각은 어리고 젊은 세대들이 하기 마련이다. 신기하게도 나이가 들수록 우정은 나이를 초월한다. 십 년의 나이 차도 우스워지는 우정이 동네 노인정에서 펼쳐지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 <흐르는 여정>에는 십년은 무슨, 3대를 초월한 우정이 펼쳐진다. 노인과 장성한 청년, 그리고 학생. 겉으로 보면 할머니와 아들, 그리고 손주라는 정석적 이미지에 완벽히 들어맞는다. 이들은 어떻게 우정을 쌓아 나갈까?
남편과 사별한 춘희(김혜옥)는 주택을 떠나 아파트로 이사한다. 그 과정 집에 들이지 못한, 남편이 남긴 그랜드 피아노를 민준의 집에 보관한다. 음악가인 민준은 전도유망한 성찬의 피아노 레슨을 봐주고, 이 셋은 천천히 우정을 쌓아간다. 사실 이들의 우정은 언뜻 가족의 모습을 띠는 것 같기도 하다. 그것은 가족의 구성에 들어맞은 인물들의 이미지 때문이다. 그 이미지는 시각에서 그치지 않는다. 민준과 성찬을 챙기는 춘희의 태도나 섬세하게 춘희를 살피고 성찬을 도와주는 민준의 행동, 아직은 어수룩한 성찬의 모습들이 바로 그것이다. 화목한 가족의 모습을 띤 이들을 보면서 전혀 불편하지 않은 까닭은 불필요한 불화도, 해결도 없기 때문이다.
<흐르는 여정>은 제목값을 하기라도 하듯 유려하게 흘러 나간다. 카메라의 이동도 하나도 급격한 데가 없다. 여유가 넘치는 움직임은 물 흐르듯 자연스럽다. 이러한 유려함에 부드러움을 더하는 것은 피아노 선율이다. 이 세 사람을 엮는 존재이기도 한 피아노는, 이 세 사람의 우정을 두텁게 쌓아가는 데에도 일조한다. 춘희의 서툰 타건과 성찬의 능숙한 타건, 그들을 바라보는 민준의 따스한 시선은 아름다운 하모니처럼 우리의 마음을 울린다.
이들의 우정이 연주하는 선율이 유독 아름다운 까닭은 정이 넘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춘희는 민준에게 밥을 차려주고, 성찬의 연주회 입상을 축하하며 식사를 대접한다. 민준은 대가 없이 성찬의 연주를 봐주며, 춘희 남편의 차 사이드미러를 수리해 준다. 성찬은 형편이 넉넉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들과 함께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열심히 달려온다. 이처럼 우정은 아름다운 선율을 자아내면서도 단단하고 굳건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그렇기에 강한 울림을 전할 수 있지 않나 싶다.
<흐르는 여정>은 리드미컬하게 세대를 초월한 우정을 쌓아 올린다. 그 과정에서 변주나 꼼수가 없다. 토대가 단단하기에 이 우정은 흔들림이 없다. 그렇기에 그들이 연주하는 우정의 선율에 불협화음이 없다. 어쩌면 이상에 가까운 이 리듬은, 이 선율이 끝나지 않길 바라는 간곡한 마음까지 품게 만든다. 그럼에도 끝을 마주하는 순간은 온다. 그때 우리는 흘러가 버린 리듬이 남기고 간 온기, 그것의 여운을 즐길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