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평론단
1970년대 매사추세츠 교외. 언뜻 평화로워 보이는 풍경 속에, 시대의 불신이 은근히 스며 있다. 켈리 라이카트의 〈마스터마인드〉는 바로 이 균열의 시간 속에서, 한 남자가 감행하는 무모한 선택을 따라간다.
영화는 한 가족의 미술관 나들이로 시작한다. 제임스와 아내, 그리고 아이는 미술관에서 단란한 가족의 모습을 보인다. 아들이 정신없이 움직이고, 엄마를 향해 재잘재잘 얘기하는 순간에 제임스는 물건을 훔친다. 훔친 물건은 아내에게 건네지고, 아들과 아내가 먼저 미술관을 빠져나간다. 제임스가 뒤따라 미술관을 빠져나오면 그 물건은 다시 제임스에게 건네진다. 평화로운 듯 하면서도 이상한 긴장감을 품는다. 중산층 가족의 일상이 어느 순간 ‘가족 절도단’처럼 보이기도 하는 아이러니. 라이카트는 첫 장면부터 단란함과 균열을 겹쳐 놓으며 이후 펼쳐질 이야기를 은근히 예고한다.
더 흥미로운 건, 제임스가 범행을 실행하는 바로 그 순간 아들이 ‘TLR 퍼즐’을 이야기한다는 점이다. 철학자 레이먼드 스멀리언이 고안하고, 조지 불로스가 변주하며, 존 매카시가 한층 더 복잡하게 만든 논리 문제에서 비롯된 이 퍼즐은, 누가 진실(T)만 말하고 누가 거짓(L)만 말하는지 알 수 없는 상황을 전제한다. 아주 쉬운 질문으로 누가 진실을 말하는지 알아볼 수는 있겠지만, 문제는 대답을 들어도 그것이 ‘예’인지 ‘아니오’인지조차 알아들을 수 없다는 점이다. 그러나 진실과 거짓을 구분하지는 못하더라도, 랜덤(R)은 반드시 진실과 거짓 사이에 선다. 영화 속 아들이 읊는 이 규칙은 단순한 놀이가 아니라, 곧 인물들의 운명을 비추는 은유로 작동한다. 제임스와 가족, 그리고 그들이 속한 시대는 누구도 완전히 진실하거나 거짓되지 못한 채, 불안정한 자리에 머문다. 영화는 바로 그 틈에서 긴장을 만들어낸다.
주인공 제임스는 평범한 중산층의 가장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가 어떤 일을 하는지, 어디에 속해 있는지는 좀처럼 드러나지 않는다. 확실한 건 책임과 가족의 무게가 그를 짓누르고 있다는 사실뿐이다. 라이카트는 이 모호한 위치를 통해, 한 인간이 삶의 압박과 욕망 사이에서 어떻게 흔들리는지를 담담하게 보여준다. 그의 선택은 치밀한 계획이라기보다 막다른 길목에서 나온 몸짓에 가깝고, 영화는 그 몸짓이 삐걱대고 어긋나는 과정을 끝까지 따라간다.
〈마스터마인드〉가 흥미로운 지점은 시대의 그림자를 다루는 방식이다. 영화는 장황한 설명 대신 거리의 풍경과 스쳐가는 장면 속에 시대의 흔적을 심어 놓는다. 베트남 전쟁을 규탄하는 구호, 페미니즘을 외치는 시위대의 모습 같은 것들이 마치 숨은그림찾기처럼 흘러간다. 이 흔적들은 인물의 삶을 직접 설명하지 않지만, 제임스의 선택에 무겁지 않게 스며든다. 관객은 그것들을 발견하는 순간마다, 개인의 무능이 사실은 시대의 균열과 맞닿아 있음을 직감한다.
영화가 포착하는 제임스의 불안은 단순히 한 개인의 무능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베트남 전쟁이 끝나가던 시기, 미국 사회는 반전 시위와 청년들의 불만으로 들끓었고, 1973년 오일 쇼크 이후 경기침체와 물가 상승, 실업률 증가는 중산층의 삶을 위협했다. 가장으로서 생계 책임은 더 이상 당연한 자리가 아니었고, 히피 운동은 퇴조하며 펑크와 디스코 같은 소비문화가 그 자리를 채웠다. 페미니즘과 시민권 운동은 전통적 남성상의 권위를 흔들었고, 매사추세츠 같은 동부 지역은 예술·철학 담론의 중심지로서 가치와 생계가 교차하는 무대였다. 제임스의 범행은 이처럼 균열된 시대가 빚어낸 하나의 단면이며, 그의 초라한 몸짓은 곧 사회가 각인한 초상으로 겹쳐진다.
아내의 존재 역시 단정하기 어렵다. 공범이라 하기엔 거리가 있고, 완전히 무지한 피해자라 하기엔 미묘하다. 그녀는 알면서도 모르는 척, 혹은 모르면서도 어렴풋이 감각하는 위치에 서 있다. 이는 당시, 여성들이 가정 안에서 처했던 모순적 자리와 닮아 있다. 제임스가 고립되는 이유는 그의 실패 때문만이 아니라, 가까운 관계조차 명확히 그를 지탱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아들의 태도를 눈여겨볼 만하다. 겉으로는 철없는 행동을 반복하지만, 은밀히 아버지에게 동조하며 끝내 그의 곁을 떠나려 하지 않는다. 이는 무너진 가부장의 자리에 여전히 남아 있는 집착과 정서적 잔여물을 드러내며, 붕괴의 그림자가 다음 세대에게까지 스며드는 듯한 불안한 감각을 남긴다.
그리고 영화에서는 제임스의 아버지를 언급한다. 저명한 법조인이라는 이력만 던져진 채, 아버지는 직접적인 목소리나 표정은 없다. 그러나 그 부재야말로 압도적인 존재감이다. 아버지는 법과 권위, 제도의 상징이고, 제임스는 실패와 불안을 안고 흔들리는 인물로 대비된다. 둘의 간극은 대화가 아닌 침묵으로 드러나며, 세대 간 단절과 시대의 균열을 상징적으로 각인시킨다. 아버지는 그림자일 뿐이지만, 제임스의 모든 선택은 그 그림자와 대척점에서 이해된다.
결국 영화가 보여주는 것은 범죄극이 아니다. 그것은 실패가 남긴 균열, 그리고 그 틈 위에서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한 인간의 얼굴이다. 도둑맞은 그림보다 중요한 것은 실패한 삶의 그림자이며, 그 그림자는 관객의 마음에 오래 잔상처럼 남는다. 라이카트는 화려한 성공의 신화를 거부하고, 실패라는 가장 진실한 기록을 스크린 위에 남긴다. 그래서 관객의 마음은 불편하고 서늘하다. 그러나 바로 그 불편함 속에서 영화는 묻는다. 우리를 파국으로 몰아넣는 것은 개인의 욕망일까, 아니면 시대라는 거대한 그림자일까. 제임스가 차창 밖을 내다보는 마지막 얼굴은 단지 그의 삶이 만든 얼굴이 아니라, 시대와 사회가 함께 빚어낸 균열의 초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