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평론단 - 비전
마냥 20대일줄 알았던 내가 어느새 앞자리가 바뀌며, 어머니와 아버지의 나이 듦을 깨달을 때가 있다. 뭐든지 알 것만 같던 아버지가 아이 같을 때, 어머니와 통화하던 중 무의식적으로 단어를 이해하기 쉽게 바꿔 말할 때가 그렇다. 영화 <철들 무렵>은 용접기사로 일하는 철택(기주봉 분)이 암에 걸리며, 자신의 무명배우 외동딸 정미(하윤경 분)의 병간호를 받게 되면서 펼쳐지는 가족 간의 부딪힘을 담고 있다.
총 4개의 장으로 나뉘어져 있는 영화는, 처음에는 철택과 정미의 이야기를 후반부에는 그들을 둘러싼 정미의 어머니이자 철택의 전 배우자인 현숙(양말복 분)과 구순을 맞은 현숙의 어머니 옥남(원미원 분)의 이야기까지 한데 엮여 풀어진다. 정승오 감독이 실제 가족의 병간호를 하면서 시나리오가 집필된 까닭일까? 철택과
정미의 상황과 감정선, 그리고 그것으로 말미 암은 여러가지 부딪힘에 대한 리얼리티가 대단하다.
영화는 때로는 유쾌하고 즐겁게, 때로는 살벌하도록 현실적으로 아픈 가족과 그를 간호하는 나머지 가족의 애환을 담아낸다. 감독은 자칫하면 고리타분할 수 있는 서사를 위트 있고 통통 튀는 편집과, 시의 적절한 한영애의 노래로 세련되게 표현한다. 극 중 철택으로 나오는 기주봉 배우가 실제 우리 아버지와 매우 닮아 있기 때문인지, 영화를 보며 마치 내가 정미가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중간 중간 참 많이 눈물이 났다.
태블릿PC로 자신의 포트폴리오를 다듬으며, 라면과 김치로 대강 끼니를 때우는 정미는 혹시나 혼자 사는 아픈 아버지가 끼니를 거를까 반찬을 바리바리 싸 들고 집에 간다. 하지만 언제나 청춘처럼 살아가는 아버지는 정미의 마음과는 다르게 술을 줄이긴커녕 여전히 반주를 즐기고, 추운 겨울에 가스비가 아까워 난방도 제대로 돌리지 않는다.
아버지의 병간호도 자신의 커리어도 최선을 다하기 위해 사방팔방으로 뛰어다니지만, 애통하게도 열심히 준비한 오디션에서 본인의 아이디어를 빼앗기고 오디션도 낙방하고 만다. 이후 자신이 타박하던 친한 언니-동료 단역배우-의 캐스팅 소식을 접하고 자신의 대체 가능한 역할에 대한 회의로 술을 진탕 마시고 울분을 쏟아 낸다. 이는 병실 한 켠에서 항암 치료를 받으며 딸 자랑을 하는 철택의 모습과 상반되어 보는 이로 하여금 감정을 더 극적으로 끌어 올린다.
늘 정미에게 투박하게 말하던 철택은 정미가 없는 병원에서는 누구보다 열성적인 정미의 팬이다. 같이 항암을 하던 옆 베드 항암 베테랑에게 얼굴도 나오지 않는 귀신1의 연기를 보여주기 위해 여러 번 스크롤을 넘겨서 보여줄 정도로 말이다. 암환자라고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쾌활하게 원래 생활을 이어가던 철택은 항암으로 인해 머리가 빠지고 손발이 꺼멓게 변하면서 문득 죽음이 아주 가까이 다가옴을 느낀다.
이러한 상황도 버거운 가운데 철택과 정미에게 병원비라는 현실적인 문제가 성큼 다가오고, 유일한 동아줄이었던 철택의 형이자 정미의 큰아빠마저도 두 부녀를 외면한다. 돈 나올 구멍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정미는 우연히 들은 효도계약서를 작성하기 위해 오랜만에 엄마인 현숙을 찾아 가게 되는데, 결국 본래의 목적은 잃어버리고 목이 메인 상태로 늦은 밤 부랴부랴 집으로 돌아온다.
가난은 참 사람을 서럽게 한다. 사람이 아픈 순간에는 더욱 매섭게
말이다. 항암 예후가 좋아 수술이 가능한 희망적인 상황에서 철택과 정미가 선뜻 수술을 반가워하지 못하는
것도 결국 현실적인 돈문제다. 가끔 아버지와 사소한 일에서 부딪힐 때마다 답답한 마음에 친언니에게 서러움을
토로하곤 하는데, 그때마다 늘상 언니가 하던 ‘아빠는 건강한
것만이라도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돼’라는 말이 영화의 후반부에 계속 머리를 맴돌았다.
영화를 보며 보통 현재 나의 삶이나 생활을 크게 떠올리지 않는 편인데, 철들 무렵은 뭐랄까 현재의 내 모습과 미래의 내 상황이 될 수 있을법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아 영화가 끝나고도 울림이 다르게 느껴졌다. 철들 무렵 첫 상영 후 기주봉 배우가 말한 것처럼 ‘이 영화는 진짜 많은 사람이 봐야 해!’ 라는 의견에 적극 공감하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