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평론단 - 비전
불교에는 제행무상(諸行無常)이라는 교리가 있다. 모든 현상은 영원하지 않다. 그러므로 집착 말라. 그 대상이 무엇이든.
<흐르는 여정>은 끊임없이 그 덧없음에 대해 말한다. 우리는 시간의 흐름과 현상의 변화를 막지 못한다. 춘희(김혜옥)는 사랑하는 남편을 잃었고, 그래서 남편 없는 집을 떠났다. 그녀도 이제 나이가 들었기에, 신체 능력은 쇠하고(혈액 투석) 기본적인 사회 활동도 어렵다(시니어 봉사). 춘희는 반복되는 이별과 상실을 겪고 소진되었다. 불 꺼진 새집에서 무수한 약봉지를 바라보며 지겹다 말한다.
하지만 이별이 있으므로 만남도 존재하는 법이다. 그새 봄이 되어 차체에는 벚꽃이 쌓인다. 새집에서 피아노를 둘 곳이 없자 난데없이 다가온 민준(저스틴 H. 민)이 자기 집에 두자 한다. 춘희는 고전 음악 음판들이 쌓여있는 민준의 집을 보고 남편을 떠올린다.
낯설고 삭막한 아파트에서, 춘희에게 익숙하고 편한 공간은 자동차뿐이다. 비 오는 늦은 밤, 그녀는 차 안에서 CD를 틀며 남편과 함께했을 과거의 경험을 재현한다. 그러다 고전 음악을 좋아하는 민준의 뒷모습을 발견하고 아파트를 배회한다. 경비에 의해 볼륨을 줄여야 했던 음악은 빗소리가 소거되며 어느새 디제시스 외부로 이동한다. 흔들거리며 춘희를 쫓던 카메라는 그녀가 민준의 집 앞에 당도하자 멈춰 선다. 음악은 다시 영화 안으로 삽입되어 민준의 피아노 소리가 된다. 음악은 영화적 힘을 통해 남편에게서 민준으로 이어진다. 새로운 가족이 탄생하는 순간이다.
춘희는 생의 의지를 놓지 않는 인물이다. 매일 피아노를 쓸고 닦는다. 나경(공민정)의 말대로 청소를 그렇게 열심히 한다. 이사 가는 날조차도 집 정원에 물을 주던 사람이다. 내 주변을 정리하고 가꾸는 일. 모든 가사일이 그렇듯 열심히 해도 티는 안 나지만 안 하면 바로 눈에 띄는 것들이다. 춘희가 여기에 몰두하는 것은 살아있음에 대한 증명이자, 내가 이곳에 존재한다는 선언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춘희는 운전도 못 하면서 세차를 계속 한다. 경비의 제지에 물을 떠 오는 수고로움을 들여서라도 계속 한다. 남편은 떠났지만, 춘희가 살아있으므로 가족은 여전하다. 이에 응답하듯 민준은 사이드미러를 고쳐준다. 의미 없는 세차에 의미 없는 수리로 호응한다. 색이 다르지만 춘희 말대로 없는 것보단 낫지 않나. 그래서 이들은 자신들처럼 혼자 남은 어린 성찬(박대호)까지 가족으로 거둔다.
처음에는 다른 사람들이 편의와 편견에 의해 가족이라 호명한 것이었지만, 이들은 어느새 진짜 가족 같은 모습이 된다. ‘엄마’라 부르며 반가워하는 민준의 얼굴. 문밖에서 꽃다발을 들고 성찬의 연주에 귀 기울이는 춘희. 함께 찍은 사진. 함께 보내는 명절. 춘희 얼굴을 찍는 성찬. 서로가 서로에게 섞인다. 그러므로 효자손으로 하는 지휘. 도레미파솔솔파미레도. 작정하고 아름답기에 불안해지는 장면들.
춘희와 민준은 회자정리(會者定離), 거자필반(去者必返)을 여러 번 되뇌인다. 만남이 있으면 반드시 헤어지고, 간 사람은 반드시 돌아온다. 결국 우리에게 이별은 정해져 있다. 하지만 춘희가 그러했듯, 우리는 아픔을 힘차게 딛고 생을 살아가야 한다. 다시 봄이 와버린 것처럼, 떠난 이와는 언젠가 또 만날 것이다. 그 전까지는 그들이 남기고 간 흔적들을 붙잡으며 좋았던 기억을 추억해보는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