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평론단 - 비전
죽은 남편이 쓰던 그랜드 피아노와 함께, 건축가였던 남편이 직접 지었고 30년 이상을 같이 살았던 단독주택에서 작은 아파트로 이사한 춘희의 새로운 생활은 시작부터 순탄치 않다. 베란다 창문을 통해서만 집 안으로 들어갈 수 있을 그랜드 피아노의 진입로가 베란다를 가린 나무 탓에 막힌 것이다. 피아노를 넣자고 멀쩡히 살아있는 나무를 베어버릴 만큼 모질지는 못한 춘희 곁에 홀연히 나타난 낯선 젊은이(민준)는 15층인 자기 집 거실에 그랜드 피아노를 두면 된다는 황당한 제안을, 어이 없는 반말로 생판 초면에 들이민다.
춘희가 다소 의심스런 이 대안을 받아들임으로써 그녀의 삶은 그랜드 피아노를 중심으로 예기치 않은 방향으로 확장한다. 민준과 춘희는 그랜드 피아노를 매개로 잦은 교류를 할 수밖에 없게 되고, 민준이 이 그랜드 피아노로 조성찬(조성진 + 임윤찬인지 아닌지 영화와 상관 없는 궁금증을 멈출 수 없다)이라는 재능 있는 제자를 가르치게 되면서 춘희는 여지껏 배워볼 생각도 안 한 피아노를 쳐보기도 하고, 난생 처음 피아노 콩쿨의 관객이 되어 보기도 한다. 그리고 영화는 그랜드 피아노와 음악을, 음악을 업으로 삼는 인물들을 효과적으로 활용하여 관객의 감정을 자연스레 고양시키는 영리함을 발휘한다.
눈치 빠른 관객이라면 첫 나레이션으로도 충분히 알아차릴 수 있을 정해진 결말을 향해 가는 춘희의 여정은 뜻밖의 만남과 이벤트가 거듭 되지만 그럼에도 멈칫거리거나 목적지를 변경하지 않고 유려하게 흐른다. 그리고 카메라는 춘희가 집도 차도 피아노도 먼지 하나 없게끔 깨끗이 청소를 하고, 남편이 손수 만든 마지막 된장으로 찌개를 끓여 주변과 나누어 먹고, 병원에서 자원봉사를 하며 보내는 하루하루를 단정하고 깔끔하게 담아낸다. 유일한 가족이었던 남편 사후 1인 가구 생활을 하게 된 춘희지만 대부분의 상영 시간 동안 그녀는 혼자가 아니다. 긴 세월 공들여 가꿔왔을 오래된 주택에도, 아직은 익숙치 않은 아담한 복도식 아파트에도, 남편과의 소중한 추억이 한가득이지만 운전을 할 줄 모르니 그저 주차해둘 수밖에 없는 구형 그랜저 자동차에까지 춘희가 애착을 가진 공간 속으로 여러 인물들이 그녀를 따라 드나들면서 소개팅에 대해서, 간절히 찾고 있는 누군가에 대해서, 오늘의 피아노 연주가 어떤 느낌인가에 대해서 의견을 주고받으며 각자의 순간들을 공유한다.
살아온 배경도 경험도 각기 다른 10대 소년과 30대 청년, 60대 (추정) 노인이 서로를 알아가고 받아들이는 작품이지만 <흐르는 여정> 속에는 극적 긴장을 위해 흔히들 집어넣는 불필요한 오해도, 거기에서 비롯된 싸움도, 뒤따르는 화해와 눈물도 존재하지 않는다. 춘희의 선택은 영화가 시작하기도 전에 이미 정해졌고, 이 흔치 않은 결정을 바탕으로 감독이 보여주고자 하는 바 또한 명확하다. 지인의 반려견이 실종되었다는 소식에도 어디서 잘 지내고 있겠거니 하고 넘어가는 춘희의 초연한 태도에서 엿볼 수 있듯이 영화는 거추장스러운 갈등도, 자칫 구질구질해 질 수 있는 현실의 어려움도 최대한 덜어내고서 때로는 차분하고 담담하게, 때로는 유머러스하고 장난스럽게 갈 길을 간다. 그리고 관객인 우리는 그녀의 우아한 뒷모습을, 비었다 다시 채워지는 그랜드 피아노의 자리를 여운 속에 가만히 바라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