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평론단
관계의 여정으로 상처를 치유하다
하마구치 류스케의 <드라이브 마이 카>
김 문 홍
서사 없이 서사를 완성하다
하마구치 류스케의 영화는 아주 독특하다. 특정한 인과율이 없는 평범한 일상의 서사 조각들이 특별한 서사를 만들어 내고 있다. 6년 만에 국내에 개봉된 러닝타임 328분의 초 장편인 <해피아워>만 해도 그렇다. 30대 후반 네 명의 여성들의 일상적인 풍경의 조각보들을 모아 감동적이고 아름다운 그림을 만들어 내듯이, <드라이브 마이 카> 역시 한 남자와 한 여자의 관계의 여정을 통해 상처를 극복해 가는 과정을 담담하게 그리고 있다. 일상의 조각들인 장면이 얽혀 의미 있는 시퀀스를 만들어 내고, 그러한 시퀀스들이 얽히고설키면서 마침내 특별한 서사 구조를 이룩한다.
<드라이브 마이 카>(179분)는 2021년 칸국제영화제 경쟁 부문에 출품되어 각본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일본의 세계적인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집 『여자 없는 남자들』에 수록된 동명의 단편소설 「드라이브 마이 카」를 각색하여 만든 이 작품은, 일종의 로드무비 영화로 빨간 빛깔의 자동차 역시 대사 하나 없는 침묵의 출연자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연극배우이며 연출가인 가후쿠(니시지마 히데토시 분)와 그의 자동차 운전기사로 임시 채용된 미사키(미우라 토우코 분)는 서로 닮은 데가 많다. 말이 별로 없고 각자 가슴 속에 상처를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이 영화의 구조와 주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러시아의 소설가이며 극작가인 안톤 체호프의 희곡 <바냐 아저씨>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안톤 체호프의 희곡 작법은 기존의 희곡이 즐겨 사용하고 있던 극작법을 회피하고 있다. 연극은 배우들에 의한 무대 위 행동의 예술이기 때문에 인물 간의 갈등과 대립, 그리고 그것에 의한 행동의 유발로 극적 서사가 전개되는 행동의 문학이다.
그런데 체호프는 이러한 기존의 극작법을 탈피하고 있는데, 그의 4대 장막희곡 중 하나인 <바냐 아저씨> 역시 그만의 독특한 구조로 이룩되어 있다. 갈등과 대립, 그리고 클라이맥스와 파국이라는 드라마의 관행에 익숙한 관객이라면 <바냐 아저씨>의 기존 문법을 벗어난 극작법에 심히 당황할 것이다. 이 영화 역시 전통적인 헐리웃 영화의 서사 전개의 법칙을 무시하고 있다. 인물과 인물 사이의 대립과 갈등, 그리고 그것에 의한 행동의 연속으로 클라이맥스와 파국으로 치닫는 기존의 영화 문법을 탈피하고 있어 그것에 익숙한 관객들을 놀라게 한다. 이처럼 이 영화는 대립과 갈등, 클아이맥스와 파국이라는 기존 영화 문법을 탈피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의 주제 역시 체호프의 희곡 <바냐 아저씨>와 그 궤를 같이 한다. 가후쿠가 히로시마 예술문화극장에서 공연할 연출가로 활동하는 작품 역시 체호프의 희곡 <바냐 아저씨>이다. 희곡의 결미 부분에서 조카인 소냐가 바냐 삼촌의 영혼을 어루만지며 위무하는 장면 역시, 이 영화의 결미 부분에서 폭설 속에 잔해만 남은 미사키의 허물어진 집을 바라보며 서로의 상처를 아루만지며 치유하는 장면과 일맥상통한다. 체호프의 희곡 <바냐 아저씨>와 영화는 서사 구조와 주제에서 많은 유사점을 지니고 있으며, 가후쿠가 <바냐 아저씨> 연출을 지도하는 과정 역시 이 영화 서사의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이 영화의 공간은 크게 두 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한 부분은 도쿄로 가후쿠와 그의 아내 오토와의 비밀스런 일상과 아내의 불륜과 죽음들로 이루어져 있고, 다른 한 부분은 가후쿠가 히로시마에서 <바냐 아저씨>를 의롸받아 연출하는 과정을 중심으로 서사가 진행되고 있다. 가후쿠가 아내의 죽음을 정리하고 하로시마로 떠나는 장면에서 오프닝 크레딧이 나타난다. 영화를 시작한지 40여 분 후 쯤이다. 결국 이 영화의 진정한 시작점은 히로사미 체류 부터이다. 그것은 곧 가후쿠가 운전기사인 미사키, 그리고 극단의 단원들을 만나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으로 서사가 진행되는 이 부분이 영화의 시작이고 출발점이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진정한 속내를 모른 채 아내를 보내다
가후쿠와 미사키는 제대로 상처 받았어야만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한 사람은 아내를 보냈고, 또 한 사람은 어머니를 보냈다. 아내는 남편과의 진정한 소통을 원했지만, 남편은 자기만의 소통 방식이 소통의 전부인 양 착각하고 있었다. 어머니는 딸에게 세상 살아가는 방식을 혹독하게 가르쳤는데도, 딸은 어머니의 그 진정한 속내를 알아보지 못한 채 힘겨워했다.
가후쿠의 아내 오토는 자신이 죽던 그날 아침, 진지하게 할 말이 있으니 일찍 들어오라고 했다. 진지하게 할 말이라는 게 무엇이었을까? 그럼, 아내와 소통한 가후쿠의 대화 방식은 거짓이었단 말인가? 그녀의 입에서 어떤 말이 터져나올지 가후쿠는 겁이 났을지도 모른다. 헤어지자는 말을 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젊은 배우와 불륜을 저지른 것에 대한 죄의식에서 나온 양심의 가책이었을까, 아니면 그의 소통 방식을 나무라며 당당하게 이별 통보를 선언하려 했을지도 모른다.
가후쿠는 늦게 집에 들어가 쓰러져 있는 아내를 목격한다. 그의 아내 오토는 지주막하출혈로 죽었다. 아내는그에게 왜 일찍 집에 오라고 했을까? 자신의 위중한 병을 알리려 했던 것일꺼, 아니면 그녀 자신의 불륜을 고백하려 했던 것일까, 그것도 아니면 두 사람 사이의 소통을 문제 삼아 이별을 선고하려던 것은 아니었을까? 가후쿠는 자신의 집에서 두 사람의 불륜 현장을 목격했다. 아내와 그녀의 드라마에 출연하는 젊은 배우 다카츠키(오카다 마사키 분)가 섹스하고 있는 현장을 목격한 것이다.
두 사람은 앉은 자세로 섹스를 하고 있었다. 다카츠키는 등을 보인 채 앉아 있는 자세였고, 아내 오토는 가후쿠가 서 있는 이쪽을 보고 앉아있는 자세였다. 그런데 그 순간, 아내 오토와 가후쿠의 시선이 서로 마주친 것은 아니었을까? 서로 마주쳤는데도 아내는 짐짓 모른 체 한 것은 아니었을까? 왜 가후쿠는 자신과 섹스를 하면서도 젊은 남자를 집안으로 불러들인 것일까? 그렇다면 가후쿠는 그날 집에 일찍 들어가 그녀외 진지하게 대화를 나누어야 했었다. 그런데도 그는 덜컥 겁이 나 그녀의 말을 무시한 것은 아니었을까? 이러한 모든 의문은 히로시마에서 공연될 <바냐 아저씨>에서 ‘바냐’ 역을 맡은 다카츠키와 가후쿠의 대화를 통해 넌지시 밝혀진다. 그렇지만 그것이 옳은 것인가에 대한 판단은 내리지 않는다.
가후쿠의 아내 오토는 방송극 작가이다. 그녀의 창작 방식은 독특하다. 남편과의 섹스 뒤에 나는 대화를 통해, 그녀가 쓰고자 하는 방송극 작품에 대한 모티브와 영감을 섹스라는 독특한 소통 방법을 통해 얻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그녀는 작품에 대한 모티브와 영감보다는 남편인 가후쿠와 진정한 소통을 원했을지도 모른다. 가후쿠는 자신의 소통 방식이 전부인 줄 혹시 착각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랬을지도 모른다. 그녀가 다카츠키와 불륜을 저지른 것은 어쩌면 가후쿠와의 소통에 대한 갈망의 몸짓이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날 그녀가 가후쿠와 진저한 대화를 하고 싶었던 것도 둘만의 소통 방식에 대한 갈증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가후쿠는 제대로 상처받지도 못한 채 그녀를 떠나보내고, 연극 연출을 핑계로 히로시마로 도망갔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거기서 그는 또 다른 상처인 미사키를 만나 비로소 자신의 상처의 의미를 깨닫게 되는 것이다.
성처끼리 짓물려 치유가 되다
이 영화의 진면목은 가후쿠가 히로시마에서 <바냐 아저씨>를 연출하는 과정에서 제대로 드러난다. 도쿄에서의 시퀀스가 상처의 원인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도피한 어정쩡한 삶이었다면, 히로시마에서 연극과 함께 한 삶은 상처의 진원을 비로소 깨닫고 그 상처를 제대로 치유하는 가후쿠의 삶을 보여준다. 그곳에서 상처를 제대로 치유하게 된 것은 사람들과의 삶을 통해서이다. 그의 운전기사인 미사키가 지니고 있는 상처, 아내의 불륜 상대였던 젊은 배우 다카츠키와의 조우, 그리고 연극 기획을 맡고 있는 한국인 연극배우 공윤수(진대연 분)와 이유나(박유림 분) 부부의 박애적인 삶의 모습, 그리고 느닷없는 다카츠키와의 조우를 통해서 비로소 가후쿠는 상처의 본질을 깨닫고 치유하게 된다.
이들과의 만남을 통해 진정한 소통을 깨닫게 해주는 소통 채널이 바로 안톤 체호프의 희곡 <바냐 아저씨>이다. 운전기사 미사키의 상처를 통해 가후쿠는 결국 상처를 치유받게 되지만, 한국 연극인 부부의 박애적인 희생의 삶을 통해 진정한 소통 채널의 의미를 발견하게 되고, 다카츠키의 돌출된 행동을 통해 아내 오토의 갈망의 진원을 파악하게 된다. 다카츠키의 돌줄된 행동의 에피소드는 잘못된 소통이 빚어내는 참혹한 결과를 은유적으로 암시한다.
이들과의 만남을 통해 결국 가후쿠는 제대로 상처받고 거듭나지만, 그 만남을 이룩하게 한 것은 결국 연극 <바냐 아저씨>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하마구치 류스케의 <드라이브 마이 카>는 다국적 영화에 가깝다. 오디션을 통해 출연이 확정된 배우들을 보면 한국, 일본, 중국 배우들이 등장하고, 그들의 대사 표현 역시 일본어, 한국어, 중국어, 그리고 수화까지 등장한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이 영화는 가후쿠와 미사키라는 두 남녀의 상처에 대한 치유의 과정을 뛰어넘어 국가와 국가의 장벽을 뛰어어넘는 다국적 소통으로까지 확장되고 있다. 결미 부분의 미사키의 한국 생활 시퀀스를 통해 관객은 그녀가 공윤수 부부와 함께 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추론을 하게 되는데, 감독은 이 시퀀스롤 통해 다국적 소통을 은유적으로 암시하고 있다.
결국 가후쿠는 미사키의 허물어진 집의 잔해 앞에서 상처를 치유받는다. 미사키 역시 가후쿠의 상처에 자신의 상처를 맞대 짓물러지는 과정을 통해, 폭설로 인한 가옥의 붕괴로 어머니를 구하지 못한 죄의식에서 벗어난다. 홋카이도의 눈밭으로 그들의 차가 들어설 때 모든 대화와 청각적 음향은 소거되고 잠시 침묵의 진공 상태로 들어간다. 순백의 설경이 이들의 상처를 포용하는 상징적 은유이기도 하다.
<드라이브 마이 카>는 관계의 여정으로 상처를 치유해 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상처는 상처끼리 맞닿아 짓물러질 때까지 서로 끌어안고 부벼대야만 치유가 가능한 것임을 은유적으로 암시한다. 또한 이 영화는 진정한 소통이 무엇이며, 서로의 진정한 속내를 알기 위해서는 올바른 소통 채널이 필요함을 역설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이 영화의 등장하는 자동차는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채널방식의 은유일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