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평론단 - 비전
영화는 탄생 이후, 여러 기술적 발전(촬영, 편집 등)을 거쳐 ‘시간’을 조작할 수 있게 된다. 몇 시간을 단순히 몇 컷으로 압축하기도 하고, 반대로 몇 초에 불과한 순간을 길게 늘여 보여줄 수도, 또는 한 컷으로 하루의 지나감을 보여줄 수도 있다. 또한 이는 내러티브와 결합하여 보는 이의 흥미를 유발하고, 영화에 빠져들게 작동한다. 의미, 혹은 쓸모없는 ‘죽은 시간’들은 제거된다. 그 결과 영화가 선사하는 시간은 현실 속 우리의 시간 감각과 다르다. 반면 최승우 감독의 신작 <겨울날들>은 영화에서 기피되곤 하는 시간을 복원시키고 있다. 현실에서 우리가 감각하는 시간을, 영화 안에서도 똑같이 느끼게 된다. 주인공도, 이야기도 없이 영화는 그저 보여준다.
<겨울날들>은 다양한 사람들이 말 그대로 겨울을 나는 모습을 담고 있다. 이제 막 서울로 상경한 이, 달동네에서 새벽 일찍, 그리고 밤늦게 출퇴근하는 이, 뿌옇게 먼지가 낀 철거 현장 속에서 일하는 이 등 여러 인물이 등장한다. 어느 한 명이 주인공은 아니다. 또한 어떠한 이야기도, 대사도 없다. 영화 속에서 들을 수 있는 소리라곤, 배경 장소의 소리, 한국의 자살률 심각성을 알리는 뉴스, 버스 혹은 전철이 움직이는 소리, 그 속에 사람들의 호흡 정도이다. 이미지 역시 오르거나 내려가야 할 수십 개의 계단, 꽉 찬 버스나 지하철과 같은 답답하거나 벅찬 인상을 주로 연출하고 있다. 이 모든 것이 편집을 최소화하여, 롱테이크 속에서 제시된다. 겨울의 서울을 바라보는 최승우 감독의 시선은 겨울이라는 계절처럼 너무나 차갑다.
어떠한 흥미도 불러일으키지 않는 내용에, 너무나 고통스러운 형식까지. 덕분에 우리는 영화 속 겨울을 지내는 대한민국, 서울 속 힘든 시간을 겪는 사람들의 고통을 (똑)같이 나누고 있지 않는가 싶다. 너무나 과도한 경쟁에 놓인 사람들과 그렇다고 그것을 뚫고 들어간 이후의 삶이 마냥 꽃길이 되는 것이 아닌 현실, 그에 반해 그 어떤 소통이나 교류가 단절된 모습, 치솟는 자살률 등 현재 우리나라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고통과 불안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이런 암울한 이미지로 점철된 영화이지만, 나는 몇 안 되는 순간에서 최승우 감독의 따뜻한 시선이 존재한다고 말하고 싶다. 꽉 찬 지하철과 대비되는, 여유로운 지하철이 깜깜한 지하의 공간을 건너 올라와 따스한 빛을 받으며 한강을 건너는 장면, 어둠이 짙게 깔린 밤이지만 그사이 빛나고 있는 남산과 그 옆에서 똑같이 열심히 빛을 발산하고 있는 하나의 별. 이런 용기를 주는 숏들이 적은 수이지만, 여기저기 산재해 있다. 겨울은 모두가 똑같이 견뎌야만 하는 계절이다.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온다. 모두가 봄을 맞이할 수 있도록, 최승우 감독은 미약하지만 견뎌보자고, 응원을 건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