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평론단
잃는 것이 아무렇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우리의 삶은 무언가를 얻고, 잃어가는 과정을 반복하며 쌓아가는 시간의 축적과도 같다. 이제는 사라짐이란 언제든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는 걸 알지만 어렸을 적 손에 쥐고 있던 초콜렛을 뺏겼을 때의 놀람은 아직도 마음 한구석에 남아있다. 그 기억이 짙게 밴 이유는 그땐 그럴 줄 몰라서, 잃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마음을 다 내주어서였을 것이다. 그래서 영화 <보태니스트>의 인물 아르신을 보면 자연스레 그 시절의 어렸던 마음들이 떠오른다.
중국의 국경 근처 작은 마을에 사는 아르신의 주변에도 상실이 늘 존재한다. 자신에게 식물학자라는 별명을 붙여준 예르켄 삼촌은 몇 년 전 산으로 들어간 뒤 자취를 감췄다. 아르신의 부모는 곁에 없고, 자신을 돌봐주시는 할머니의 생사를 콧바람으로 확인하려는 아이의 손길엔 당황스러움보다는 익숙함이 배어 있다. 아르신의 형은 민족의 오랜 풍습에 따라 할머니의 아들로 맡겨져 삼촌으로 불러야 할 사람이 되었다. 그에게 주변인들은 이미 이별했거나, 언젠가는 이별해야 하는 존재들이다. 아르신의 외로움을 미리 알아챘을까, 예르켄 삼촌은 아이인 아르신에게 식물을 살피고 채집하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그가 남긴 이야기들을 되새기며 아르신은 마을의 나무와 풀, 물을 만지고 느낀다. 그것들은 아르신을 떠나지 않는 좋은 친구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영화 속의 아름다운 풍경 속 자연물들은 배경으로서 그치지 않고 아르신을 보듬어주는 품 같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소리, 흐르는 냇물 소리는 자장가가 되어 아르신을 위로한다.
그래서 친구 메이유는 아르신에겐 더 특별한 존재이다. 메이유는 아르신이 예상한 시간에 어김없이 나타나주는, 나무처럼 늘 거기에 있는 친구이다. 그녀와 함께라면 그의 괴짜 같은 식물 사랑도, 아이들만이 할 수 있는 발칙한 상상도 이룰 수 있다. 그랬기에 그런 그녀가 떠난다는 소식은 아르신의 세계에 생긴 엄청난 붕괴이다.
하지만 아르신은 사람들이 떠나감을 막을 수 없다. 그저 자신이 열심히 만든 두툼한 식물책을 건네고, 남겨둔 미러볼의 불빛을 바라보거나, 폐교의 화분을 돌보는 일을 계속할 뿐이다. 돌아오지 않는 남편이 늘 넘어오던 언덕을 향해 매일 손전등 빛을 쏘는 여인처럼. 누군가에겐 무용한 일이고, 미련한 일이다. 그러나 예르켄 삼촌은 식물학자(Botanist)는 식물을 기억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아르신이 매일 하는 일들은 소중한 것들을 기억하고 추억하는 행위이지 않을까. 다만 기억한다는 것은 그리움과 고독도 함께 여미는 작업이다. 영화 곳곳에서 아르신이 맞닥뜨리는 환상적인 사건들은 그에게 내재되어 있던 외로움과 상실의 고통을 스스로 이겨내고자 하는 치환의 노력이고, 또 치유다.
어느 날 메이유는 아르신에게 이 지대가 아주 예전엔 바다였다고 말한다. 메이유를 통해 전달된 땅의 기억은 그 순간 그곳을 바다로 만든다. 언덕의 굴곡은 바다의 물결이 되고, 바람 소리는 파도 소리로 치환된다. 아르신은 그것들을 기억할 것이다. 냇물로, 바람으로, 풀잎으로. 그리고 그들에 대한 그리움이 너무도 짙어질 때는 초원 위를 내달릴 것이다. 빙글빙글 원을 그리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