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평론단 - 비전
배우 고경표가 제작을 맡아 화제가 된 영화 <미로>는 교통사고로 아내를 잃은 영문이 탐정 사무소에서 일하는 희미에게 가해자였던 상기의 근황에 대해 의뢰하며 시작된다. 희미는 영문에 만약 상기를 찾게 되면 어떻게 할 것인지 묻지만 영문은 그저 그가 어떻게 살고 있는 지 궁금하다며 답한다. 동시에 상기 또한 희미에게 영문을 찾아달라고 의뢰하며 영화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고경표 배우는 한 층 더 깊어진 연기력으로 극 전체를 끌어간다. 그 동안 <감자별 2013QR3>과 <SNL 코리아>의 코믹한 연기, <응답하라 1988>의 로맨스 연기로 대중에게 각인되었던 고경표는 <미로>에서 아내가 사망한 후 깊은 상실감에 빠져 겉으로 드러나는 큰 감정의 기복이 없이 내면에서 홀로 가라앉는 영문을 연기하며 확장된 연기 스펙트럼을 보여준다. 상황을 과장되게 표현하는 대신 손의 떨림이나 눈빛, 미세한 몸집으로 영문의 캐릭터를 구현해간다. 어딘가 비어 보이는 그의 시선 끝에서 관객들은 영문이 겪는 상실감을 고스란히 전달받는다. 특히 이번 영화는 고경표가 배우 뿐 아니라 직접 설립한 영화 제작사 필르머의 첫 장편 작품으로 그가 기획과 제작, 편집 등 영화 전반에 직접적으로 관여한 작품인 만큼 그의 훌륭한 연기는 곧 그의 애정이 반영된 결과물일지도 모른다. 고경표 뿐 아니라 희미 역의 위지원, 상기 역의 류경수 배우 역시 모호한 분위기의 영화를 더욱 돋보이게 하는 연기로 극의 분위기를 섬세하게 구축해 간다.
이러한 인물들의 미묘한 심리를 강화하기 위한 상징적인 연출도 돋보인다. 아웃 포커싱으로 소품이나 인물의 신체를 비추며 훌륭한 서사적 도구로 사용하고 관객의 몰입도를 높인다. 아내와의 과거를 회상하는 플래시백 화면은 흑백으로 처리하며 관객의 직관적인 이해를 돕는다. 동시에 특징적인 소품을 활용한 희미가 손에서 놓지 못하는 큐브뿐 아니라 캐릭터들이 타는 차량을 통해서도 직관적으로 인물들의 면면을 살펴볼 수 있다. 낚시터에서부터 고성방가로 갈등을 빚으며 술주정과 욕설을 일삼는 패거리가 타는 퍼포먼스 블루 컬러의 아반떼 N과 대비되는 영문의 까만 구형 그랜저는 직관적이고 유머러스하게 캐릭터를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이처럼 영화 <미로>는 배우들의 탄탄한 연기력과 치밀한 연출을 바탕으로 서사를 빌드업해가며 극 내내 미묘한 감정을 파고드는 심리극이다. 자극적인 사건 묘사를 뒤로한 채 인물 개개인의 공허한 눈빛 사이로 사건의 이면을 파헤쳐 가다보면 영화의 결말에 다다른다. 영화 제작자로서 새로운 도전을 한 고경표와 <모퉁이> 이후 두 번째 장편을 연출한 신선 감독의 다음 행보에 더욱 기대하게 만드는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