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평론단 - 비전
1958년은 한국 역사상 가장 많은 출생아 수를 기록한 해이다. 이른바 ‘58년 개띠’라 불리는 그 세대는 한국 사회의 굴곡진 역사를 겪어내고 지금은 은퇴의 시기를 맞이했다. 영화의 주인공 춘희 역시 수많은 58년 개띠 중 한 사람이다. 남편과 함께 성실한 삶을 살아왔고, 이제는 사별 후 홀로 남겨진 우리의 평범한 이웃이기도 하다. 김진유 감독의 영화 <흐르는 여정>은 춘희의 삶을 통해 평범함 속에 발견되는 삶의 빛과 관계를 통해 새로운 의미를 갖는 순간들을 섬세하게 담아낸다.
무용한 것이 유용해지는 순간
춘희는 오랜 세월 함께한 주택을 정리하고 시내의 자그마한 복도식 아파트로 이사한다. 벚꽃 날리는 봄날, 이제 그녀에게 남은 소중한 물건은 남편이 아끼던 오래된 자동차와 스타인웨이 그랜드피아노, 그리고 화분 하나다. 그러나 이 물건들은 역설적으로 그녀에게 무용하다. 화분은 그렇다 치더라도, 운전을 하지 못하고 피아노를 칠 줄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춘희에게 이 물건들은 매일 닦고 보살피며 남편이 떠난 공허함을 채운다. 무용한 것들이 그녀를 살아있게 하는 것이다.
이사를 하며 화분은 집에 두었고, 차는 이사한 1층 아파트의 베란다에서 보이도록 주차했다. 하지만 피아노가 문제였다. 덩치가 큰 피아노를 옮기기 위해서는 베란다 앞 화단에 있는 나무를 베어야했기 때문이다. 그때 이웃 청년 ‘민준’이 등장하며 자신의 집에 피아노를 두자는 뜻밖의 제안을 한다. 민준은 음악을 전공한 지휘자라고 하니 그녀가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피아노를 계기로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해 알아가기 시작한다. 민준은 평생 물수건으로 피아노를 닦아온 춘희에게 피아노를 닦는 법을 알려주고, 그녀에게 가벼운 멜로디를 치는 방법을 알려준다. 피아니스트를 꿈꾸는 민준의 학생 성찬까지 등장하며 피아노는 비로소 제 역할을 하기 시작한다. 단순히 추억의 대상이었던 피아노가 이제는 세대를 잇고 관계를 확장하는 매개체가 되었다.
자동차 역시 마찬가지다. 주차장에 세워두고 닦기만 했던 차는 장식품과 다를 바가 없지만 남편과의 추억이 깃든 차는 여전히 춘희에게 소중하다. 아파트 주차장에서 세차를 할 수 없다는 제지에 맞서 반상회에 참여해 규정을 조율해내는 과정은 유머러스하게 그녀의 홀로서기를 보여준다. 늘 서 있거나 견인차에 끌려가던 자동차였지만, 민준과 성찬과 함께 나들이를 떠나는 장면에서는 추억의 물건이 아닌 현재의 일상을 넓히는 동반자가 된다. 남편이 남긴 물건들의 가치를 찾아가면서 춘희의 삶은 따뜻하게 채워진다.
쌓이는 먼지를 닦아내는 삶
오래된 지인들과의 대화는 그녀가 얼마나 깊은 사랑을 받아왔는지 보여준다. 은퇴한 조율사가 남편과의 인연을 바탕으로 기꺼이 피아노를 살펴주고, 카페 사장은 형님에게 혼난다며 형수를 챙기며 웃음을 건네고, 지인은 여전히 형부의 음식 맛을 기억한다. 이 모든 흔적이 그녀가 사랑받았음을 증명한다. 아이 없이 살아왔지만, 그 곁에는 언제나 따뜻한 마음이 머물러있다. 그리고 이제 그녀는 자신이 받은 사랑을 조용히 정리하며, 또 다른 이들에게 사랑의 자취를 남기고 떠날 준비를 한다.
‘삶이란 끊임없이 쌓이는 먼지를 닦아내는 것’이라는 그녀의 말처럼, 하루하루를 차분히 가다듬으며 마무리하는 태도는 그녀가 지켜온 품위이지 마지막까지 이어지는 삶의 방식이다. 그녀의 마음은 민준과 성찬에게 전달되어 그들에게 또 다른 온기를 전한다. 서로의 배려가 만들어낸 선함이 또 다른 따뜻함을 만들어내는 마음 훈훈한 과정을 영화는 선사한다.
영화의 세계는 다소 이상적이다. 친절한 인물들과 간결한 갈등은 현실의 복잡함을 덜어내며 때로는 의문을 갖게 한다. 하지만 반대로 이 점이 춘희의 개성을 부각한다. 영화 중간중간 나오는 유머는 잔잔하게 삶의 무게를 덜어주며 홀로 남은 춘희의 삶에 애정을 갖고 관객이 바라볼 수 있도록 만든다. 영화의 끝에 다다르면 우리는 한 사람이 살아가며 무엇을 남기고 가야 하는지, 그리고 친절이 어떻게 다시 친절로 되돌아오는지 자연스레 곱씹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