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평론단 - 비전
<지난 여름>에 이은 최승우 감독의 두 번째 영화 <겨울날들>. <지난 여름>에서 느꼈던 것처럼, 최승우 감독의 연출은 다소 실험적이고 도전적이다. 대중적이진 않지만 관객에게 신선한 낯섬을 전달하고 싶어하는 시도로 읽힌다.
전작 <지난 여름>은 한 젊은 청춘의 농촌 일상을 비교적 일반적인 극영화 형식으로 풀어낸 것과 달리, <겨울날들>은 그 틀에서 꽤 벗어나있다. 하지만 가만히 시선을 두고 따라가다 보면 일반적인 영화적 그리고 서사적 요소, 정서적 울림은 분명 존재 한다.
- 침묵이 주는 일상의 무게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지극히 평범한 일상들을 반복적으로 보여준다. 말 그대로 ‘겨울날들’이다. 하지만 주인공이 누구인지는 불분명 하다. 내가 생각한 인물이 이야기의 중심인지, 혹은 극영화인지 다큐멘터리인지 혼란스럽기도 하다.
이 모호함, 특히 인물에 대한 궁금증은 러닝타임 내내 끊임없이 이어진다. 극 중 인물의 이름은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순간이 되어서야 비로소 알 수 있다. 그러면서 깨닫게 된다. 주인공 중 한명은 <지난 여름>의 민우였구나 하고.
민우가 <지난 여름>에서의 농촌을 뒤로하고 서울역에 도착하며 서사가 시작된다. 그러나 민우가 서울에 오게 된 이유, 그의 직업, 그가 바라는 삶에 대한 명확한 정보는 끝내 주어지지 않는다.
대신 영화는 단편적인 이미지와 반복되는 컷을 통해 관객이 직접 퍼즐을 맞추듯 인물을 채워가도록 유도한다. 하지만 마지막까지 그 인물들은 완성될 수 없다. 끝내 완성되지 않는 그 빈자리는, 오히려 현실 속 인물들의 불완전함과 닮아 있다.
무엇보다 영화의 독특함은 ‘무언’의 형식에 있다. 대사 없는 침묵은 관객을 낯설게 만들지만 동시에 압도적으로 사로잡는다. 영화는 대사는 없지만 일상의 소리와 소음이 그 자리를 메운다. 집 철거 현장의 굉음, 편의점 냉장고의 진동, 전자레인지 작동소리, 지하철 소음 등 우리에게 익숙한 일상과 생활 속 소리와 일상의 모습들이 화면 가득 메운다.
84분간의 러닝타임 내내 등장인물의 대사는 단 한마디도 없다. 드디어 주인공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 하는 순간조차도 대사는 없다. 그 침묵은 결코 비어있지 않다. 그 침묵이 오히려 관객들에게 묵직한 메세지로 다가온다. 장면은 대사 한마디 없이 오롯이 일상을 보여주는 인물들을 통해 관객들을 온전히 몰입시킨다. 왜냐하면 인물들의 일상을 보면 볼수록 꼭 평범한 우리의 삶의 모습 그대로 인 것처럼 보이니깐. <겨울날들>은 결국 언어가 아니라 ‘일상의 소리와 침묵’으로 관객을 이야기 속으로 끌어들이고 있었다.
- 삶의 궤적, 반복해서 이어지는 직선들
서울에 막 상경한 민우와 이름 모를 인물들은 모두 계단과 언덕을 오르내린다. 집으로 가려면 끝없는 오르막길을 올라야 하고, 다음 날이 되면 또다시 내리막길을 내려와 혼잡한 버스와 지하철 속으로 몸을 싣는다. 일하고, 지쳐 돌아오면 다시 같은 길을 반복해 오른다.
웃음 하나 없이 무미건조하게, 그저 살아내듯 반복되는 일상. 이 리듬은 각기 다른 인물들의 삶을 직선처럼 병치시키면서도, 동시에 그들의 외로움과 고단함이 결국 교차하는 지점을 만들어낸다. 그 리듬은 시적이기도 하며 우리의 일상 속 살아가기 위한 호흡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또 영화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것 중 하나는 문과 창문이다. 첫 장면도 반쯤 열린 문을 비추며 그 너머 들려오는 공사 현장의 소음을 비추며 시작된다. 인물들은 문을 드나들며 집이라는 사적인 공간, 업무 공간을 오가고 이동할 때는 버스와 지하철의 문을 통과한다.
그리고 집에 들어서면 창문을 통해 바깥세상을 바라보고, 일터에서는 창 너머로 도시의 풍경을 마주한다. 매일 마주하는 지하철 창문을 통해 살포시 보여지는 도시의 풍경은 출퇴근길 누리는 찰나의 여유가 되기도 한다. 창문을 통해 세상을 바라볼 여유가 없는 경우도 많지만 말이다.
문은 세상을 향해 나아가고 넘나드는 통로이자, 현실의 경계이기도 하며 창문은 답답한 일상 속 작은 숨구멍 같은 존재가 아닐까 싶다. 그래서 영화는 문과 창문을 통해 인물들의 삶이 때론 고립되고 또 세상과 연결되었다, 닫힘과 열림 사이를 끊임없이 오가고 있다는 것을 반복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겨울날들>은 결코 친절한 영화는 아니다. 관객에게 충분한 맥락을 제공하지도, 감정이입의 여지를 쉽게 열어두지도 않는다. 그러나 바로 그 불친절함 속에서 영화는 질문을 던진다. 대사 없이 인물의 삶의 궤적을 묵묵히 따라가며 관객에게 삶의 본질적인 질문을 만날 수 있다. 끊임없이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살아가고 있는지, 진정한 삶의 의미는 무엇인지 고민하게 만든다. 화려하고 극적인 사건 없이도, 삶의 가장 기본적인 순간들만으로도 공감과 여운을 남기고 있다. 그래서 이 영화는 마치 우리의 삶을 무심히 바라보는 거울과 같다는 생각이 든다. 대사 없는 침묵과 반복되는 일상, 그리고 불확실한 인물의 서사를 통해 관객 스스로 사유하게 만든다. 영화적 실험이라는 외피를 넘어, 결국 이 작품은 익명의 도시인들이 살아내는 겨울날들의 초상화를 담아낸다. 그것은 곧 우리의 초상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