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평론단
죽음을 인지하고 슬퍼하는 일은 학습으로 가능한 일일까, 인간의 본능적인 행위일까. 죽은 사람과는 영원히 다시 만날 수 없다는 것 정도를 제외하면, 죽음은 무척이나 추상적인 개념이다. 그렇기에 망자를 애도하는 영역은 아직 어린아이에게는 낯설 수밖에 없다. <르누아르>는 순수한 아이 후키(스즈키 유이)의 시선으로 죽음에 조심스럽게 다가선다. 그렇게 다가선 결과 후키는 어떤 세계에 다다르게 될까.
주인공 후키의 아버지는 암에 걸렸다. 불치의 지경에 이른 환자가 집 안에 있다는 것은 음울한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는 것과 같다. 죽음을 예감한 후키의 아버지는 무기력하고 우울하며, 남편의 죽음을 기다리는 후키의 어머니는 신경질적이고 몹시 예민하다. 이는 직장 내 괴롭힘으로, 회사로부터 연수를 제안받는 것으로 드러난다. 요컨대 가정 내 분위기는 불안하기 짝이 없다는 것이다. 부모의 죽음을 어린 시절에 마주하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기에, 후키는 그 나이대 아이들이 하지 않을 법한 행동과 생각을 한다. 죽음과 관련된 에세이를 써서 어머니를 학교에 소환하기도 하고, 초능력 훈련과 같은 신비주의적 힘에 심취하기도 한다. 이 모습들은 엉뚱함으로 포장하기에는 기이한 면이 있다. 그래서 아버지의 죽음을 앞둔 아이의 당연한 불안의 발로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후키가 관심을 갖게 되는 죽음은 호기심의 시발일 뿐이다. 죽음은 아이의 영역이 아닌 어른의 영역이고, 후키는 순수하고 순진한 모습으로 어른의 세계에 접근해 나간다. 그 과정은 단편의 모음 같기도 하다. 어른의 세계는 신기하고 재미있는 영역이기도 하지만 어린 후키에는 위험하기도 하여 아찔한 순간이 펼쳐지기도 한다. 호기심에서 출발한 접근은 이내 후키의 세계를 확장시킨다. 그 과정은 리듬감이 있지만, 잔잔하고 고요해서 소리없는 파문처럼 느껴진다. 후키의 세계가 퍼져 나가는 것이 더욱 명확하게 보이는 까닭은, 영화의 계절이 여름이기 때문이다. 가장 생명력이 충만한 계절, 자라나는 아이의 앳된 얼굴에 드러난 표정만큼 분명한 건 없다. 새로운 세계를 접했을 때의 생경함이 표정으로 가감 없이 드러난다.
영화 <르누아르>는 어린 아이였었지만, 이제는 어른이 되어서 어린 아이의 감정에 대해서는 다소 긴가민가해진 우리에게 주인공 후키를 통해 과거를 상기시킨다. 죽음은 호기심의 단초일 뿐, 죽음이라는 영역에 갇혀 버리지 않는다. 아이의 시선에서 어른의 세계를 관찰하고 모방하며 임하는 후키에게 우리는 차근차근 공명해 나간다. 마침내 아이의 세계가 어른의 세계로 퍼져 나갔을 때, 비로소 우리가 후키의 감각을 온전히 느꼈을 때. 우리는 아주 익숙하지만 잠깐 잊고 있던 성장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