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평론단 - 비전
이 영화 <철들 무렵>은 <이장>을 선보이며 데뷔했던 정승오 감독의 두 번째 장편 영화다. 감독은 전작<이장>에서 과거를 정리해야 하는 한 가족의 이야기를 하면서, 현재 한국인 가족에게 얽혀있는 과거의 힘과 현재의 가족 관계 등을 유머러스하게 풀어냈었다. 그에 이은 두 번째 장편인 <철들 무렵>은 주로 한국인 가족들의 현재 상황과 저들의 희망을 역시 유머러스하고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현재 한국인과 그 가족 관계의 웃픈 현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정승오 감독은 한국 가족들의 과거에서 현대를 거쳐, 미래로 나아가는 모습을 재미있게 그려내는 장인의 경지로 나아가는 듯하다.
영화에 비쳐지는 한국인 가족들의 현재 모습을 소리로 꼬집어낸다면, 첫째 고함 소리다. 고단한 한국인 삶의 가장 구체적 표현이 고함이 되어 나타난다. 흉선암 4기 판정을 받은 아버지 철택은 병 때문에 수시로 찾아오는 고통에 고함을 지른다. 자신을 돌보려고 애쓰는 딸과는 간병 과정에서 결국 말다툼 끝에 고함을 지르게 된다. 딸 정미는 배우의 길을 걷지만 영화에서 얼굴은 비치지도 않고 지나가는 좀비 단역에 불과하고, 원하던 배역의 오디션에서 떨어지자 자조적 술자리 이후, 홀로 고함을 내지른다. 이런 악조건의 아빠와 딸과는 다르게, 가족 내 역할과 사회적 역할을 마치고 전원에서 은퇴 생활을 즐기는 엄마 현숙(그녀는 아빠와 20 여년간 별거 중이다) . 하지만 그녀도 친정 식구들과의 관계에서는 어머니 구순 잔치와 그 이후의 어머니 돌봄 문제로 큰 소리를 칠 수 밖에 없다. 수시로 고함 치지 않고는 영위하기 어려운 현재 한국인과 가족들과 그 가족 관계를 영화는 수시로 전시하는 것이다.
영화에서 한국 사회의 아이러니를 느끼게 하는 시퀀스. 아빠와 딸은 암을 치료하기 위해 항암 치료와 수술에 들어가야 하는데 돈이 없다. 둘은 이동 중인 차 안에서, 이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을 짜내다가 결국 다투게 되는데, 저 뒤로는 고층 건물들과 아파트들이 보인다. 한국 사회는 부의 편중 현상으로, 어려운 사람들은 병이 들면 생명 연장 보다 치료비나 간병비 등 돈을 먼저 걱정해야 하는 슬픈 현실을 느끼게 한다. 영화에서도 병원비 등 돈 때문에 가족들은 서로를 갈등하고 원망하며, 결국은 멀어지고 흩어지는 것이다.
이 영화에서 한국인 가족들의 삶의 특징을 소리로 찾아낸 두 번째 특징은 탄성에 대한 것이다. 여기서 탄성은 기쁜 일을 맞았을 때 지르는 소리 들이다. 이 영화에서는 탄성이 없다. 있어도 주위의 지탄을 받을 뿐이다. 정미의 큰 아버지 식구들은 손자의 생일 잔치를 벌인다. 하지만 정작 생일 당사자인 손자는 기쁨을 표현하지 않고, 주위 식구들의 눈치만 살필 뿐이다. 또 정미의 외할머니는 자신의 구순잔치에서, 자식들과 식구들, 그리고 손님들이 열심히 축하를 전하지만, 정작 당사자인 본인을 기쁨의 표현은 없고 도리어 잔치가 빨리 끝나기 만을 바란다. 또한 정미는 병원에서 아빠가 내일 퇴원할 수도 있다는 소식에 기쁨의 탄성을 질렀다가, 되려 무안을 당한다. 한국인과 그 가족들은 기쁜 일에도 탄성도 지르지 못하며 주위 눈치만 살필 뿐인 것이다.
이 영화에서 외할머니 옥남은 한국인의 가족사를 구술하는 목소리로, 그 역할이 지대하다. 그녀의 표현대로 라면, 90년의 징글징글한 세월을 산 것이다. 혹독한 일제 강점기의 굶주림과 동원 노동, 전쟁 중에 겪는 잔혹한 학살, 또한 군부 독재 시절에 민주화를 추구하던 젊은 이들의 죽음과 고통이 그녀의 구술 속에 생생히 담긴다. 한데 그녀는 혹독한 삶 속에서도 꿋꿋하게 버텼고, 그 버팀으로 자기 삶에 자신감을 갖다 가도 이겨냄 그 순간에 닥친 공허함을 말한다. 이런 고난을 버텨내고 이겨냄이 인생일까? 뭐 하러 이리 어렵게 살아낼까, 살아낸다 한들 이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런 공허함 마저 지나야 철드는 것일까? 한국인과 그 가족들은 이렇게 어려움 속에서 고함 지르게 되고, 제대로 된 기쁨의 탄성도 지르지 못하며, 다 이겨낸들 공허함을 맞이하게 되고 마는가? 이런 과정을 다 이겨내야 철이 든다는 말인가?
영화가 이렇게 우리들의 이야기를 무겁게도 때론 재미나게도 풀어나가고, 우리 한국인들과 그 가족들이 현재를 헤쳐나가는 모습으로 막을 내리는데, 우리는 영화의 맨 처음 부분을 다시 생각해 보게 된다. 영화의 시작에서, 아빠 철택은 홀로 담담하게 일터에서 일하며, 딸 정미는 홀로 오디션을 준비에 열중하고 있으며, 엄마는 명상과 체조 등으로 홀로 자신을 단련하고 있다. 홀로 있을 때, 이들 각각은 당당하고 자유롭게 각자의 삶을 헤쳐나가며 살고 있다. 그 자체로 평화롭다. 이들은 혼자일 때, 자기의 삶을 자기 식대로 즐기고 있는 것이다. 한데 가족 관계가 끼어들면 복잡하고 시끄러워진다. 그러기에 외할머니는 90을 넘겨서 주위의 돌봄이 필요할 텐데, 딸의 부양도 거절하며 혼자 만의 자유로운 생활을 요구하는 것이다. 이게 우리 한국인 가족들이 원하는 미래 생활인가? 각각 살아가는 각자 도생이 이상적이란 말인가? 이것이 영화<철들 무렵>이 제시하는 우리의 미래가 될 수 있을까?
한국 가족사의 과거와 현재를 재미 있게 풀어내며, 우리와 우리 가족의 모습을 세밀하게 잘 그려내기에 우리는 정승오 감독에게 기대한다. 다음 작품에서는, 미래에는 함께 잘 살아가는 우리 모습이 더욱 재미있게 그려지기를 말이다. 공허함 까지도 지나, 철든 우리와 우리 가족들의 성숙한 모습들에서 마음껏 기쁨의 탄성을 지르게 되는 영화를 기대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