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평론단
“왜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나?” 프랑코 영화에서 로맨스라니. 극단적 현실주의와 사회적 리얼리즘에 천착하던 감독이 사랑 이야기를 꺼내는 순간, 관객은 그저 낯설기만 하다.
영화는 멕시코 출신 무명 무용수 페르난도와 재벌 가문의 후손 제니퍼의 만남으로 시작한다. 두 사람의 이질적인 직업과 신분의 격차만큼이나 사랑을 향한 꿈도 점점 간극을 드러낸다. 두 사람의 사랑은 멕시코시티의 ‘밀실’에서 움튼다. 페르난도는 제니퍼와 함께하기 위해, ‘더 넓은 세계’의 큰 무대를 꿈꾸며 국경을 넘는 위험을 무릅쓴다. 반면 상류층으로서 이미 샌프란시스코에서 성공한 삶을 누리고 있는 제니퍼는 페르난도가 멕시코에 머물면서 그녀의 비밀 연인이 되어 주기를 바란다. 그들의 사랑은 국경과 계급의 경계를 두고 서로 다른 욕망을 꿈꾼다.
영화 <드림스>는 몸에 대한 서사가 플롯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등장인물은 춤을 추고, 사랑을 나누고, 서로를 가두고, 끝내는 상대의 몸을 파괴하는 지경에 이른다. 매혹하고, 탐닉하고, 억압하고, 지배하는 욕망을 위해 육체는 단순한 사랑의 매개가 아니라 권력의 도구가 된다. 페르난도의 젊음과 육체는 제니퍼의 권력과 자본으로 교환되고, 두 사람의 로맨스는 서로를 지탱하는 관계로 존재하기보다 소유하려는 충동으로 기운다.
존재로서의 사랑이 아닌 소유로서의 사랑으로 치우칠 때 두 사람의 관계는 파국을 예감하고 있다. 불법체류자의 신분으로 낯선 세계의 국경을 드나드는 것이 자유롭지 않은 페르난도는 국가 권력에 의해 ‘억류’된다. 하지만, 자신의 억류가 제니퍼의 신고로 이루어진 것을 알게 된 페르난도는 멕시코 집 안에 그녀를 강제로 ‘억류’한다. 서로가 서로를 자신의 세계에 가두는 소유의 욕망은 극으로 치닫는다. 페르난도는 사적인 복수를 실현했다고 믿었겠지만, 이 징벌의 시도는 곧 더 큰 권력의 욕망에 의해 무력화된다. 사랑을 향해 엇갈린 꿈은 서서히 집착에 의한 욕망으로 서로를 파괴한다.
감독은 지고한 사랑으로 냉혹한 세상의 계급과 차별을 극복할 수 있다는 낙관적 서사를 애초부터 배제하고 있는 듯하다. 오히려 프랑코는 이러한 환상을 해체한다. 사랑은 계급과 국경, 제도적 불평등으로부터 독립된 순수한 감정일 수 없으며, 오히려 사랑 그 자체가 불평등의 가장 내밀한 무대가 됨으로써 외부 세계의 차별을 투영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주고자 한 것은 아닐까.
페르난도의 춤은 자유를 향한 몸짓이지만, 그의 몸은 끊임없이 거래되고 억류된다. 맨몸을 통해서만 존재를 증명해야 하는 이 빈털터리 남성의 위치는, 자본의 우월한 힘으로 타인의 몸을 점령할 수 있는 제니퍼의 권력과 날카롭게 대비된다. 사랑이라는 ‘꿈’은 현실이라는 ‘욕망’ 앞에 무릎을 꿇는다.
따라서 <드림스>는 로맨스가 아니라, 로맨스의 불가능성에 관한 영화라 할 수 있다. 사랑조차 불평등의 재현을 벗어날 수 없다면, 무엇이 평등한 관계를 보장할 수 있을까? 마지막 장면에서 클로업 된 제니퍼의 침묵하는 얼굴은 프랑코 감독의 목소리를 소리 없이 대신하는 듯 서늘하다. 우리 안에도 있을지 모를 또 다른 제니퍼를 마주하는 섬찟한 느낌을 받는다. 자본은 서고 사람은 쓰러지는 이 매정한 도시에서 싸늘한 우리 시대의 사랑은 어떤 꿈을 꿀 것인가?
영화가 성취한 것은 지극히 비관적인 세계관이다. 폐허 위에서 우리는 다시 희망을 꿈꿀 수 있는가. 우리 시대에 만연한 염세관을 극복하기 위해 예리한 예술가의 따가운 시선과 차가운 통찰에서 길을 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