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평론단
‘더 크게 더 강하게 돌아왔다!’ 여름 블록버스터 속편의 단골 캐치프레이즈이지만, 지향점이 다를지라도 알렉산드레 코베리제 감독의 <마른 잎>에 이 말을 적용하고 싶다. 이 영화는 전작 <하늘을 바라본다, 바람이 분다> 보다 30분 더 크게 만들어 러닝타임이 3시간을 넘긴다. 그 시간 속에서 우리의 인지 능력을 더 과감하고 더 세밀하게 자극하는 장면들을 엮어두었다. 사라지는 것에 대한 주제 의식 역시 전작에 비해 강화되었다. 애초에 영화의 중심 줄거리부터가 사라진 딸을 찾는 이야기이니.
편지 한 장을 남겨 두고 딸이 사라졌다. 경찰은 28살이나 된 성인이 자진해서 집을 떠났다면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한다. 그래서 아버지 이라클리(데이비드 코베리제)는 딸의 동료 레반과 함께 딸을 찾는 여정을 시작한다. 단서는 오직 하나, 그녀가 지역 곳곳의 축구장들을 취재 중이었다는 것이다. 축구장을 찾아다니며 딸의 행방을 쫓는다니, 현실적으로든 영화적으로든 쉬울 리 없다. 갈피를 못 잡고 헤매는 아버지와 달리, 감독 아들은 목적지를 향해 분명히 나아가는 것으로 보인다.(아버지 배역은 알렉산드레 코베리제 감독의 실제 아버지가 맡았다)
<하늘을 바라본다, 바람이 분다>는 마치 영화학과 2학년 학생이 작업한 듯한 느낌을 주었다. 촬영과 편집에서 다양한 가능성을 탐구하며 그 자체로 즐거워 어쩔 줄 모르는 그런 분위기가 영화에서 느껴졌다. <마른 잎>은 이와 상반된 분위기로 영화가 전개되지만, 실험정신은 여전하다. 15년도 더 된 휴대폰 카메라로 촬영한 이 영화는 흐릿한 저해상도 화면 속에서 존재하는 것, 보이는 것, 느끼는 것의 한계와 차이를 밝히는 데 집중한다. 흐릿한 화면 속에서는 움직임이 없으면 화면 속에 비치는 게 고양이의 발인지 돌멩이인지, 심지어 고양이는 맞는지 이게 기린은 아닌지 분간하기도 어렵다. 마치 숨은그림찾기나 숨바꼭질을 하는 듯한 효과도 빈번히 일어난다. 픽셀 단위에서 움직이는듯한 이미지들이 색다른 변형을 보여주는 와중에, 보이지 않지만 있습니다, 다른 것을 보여주지만 이게 그겁니다 하는 식의 유희도 여전하다. 가령, 쭉 뻗은 선이 중요하다고 강조하지만 정작 저해상도의 화면에서는 매끈하게 곧은 선이란 볼 수도 없고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이번 영화에서 감독은 픽셀 단위에서 영화의 시각적 이미지를 선보이는 가능성에 대하여 탐구하면서 (쓸모가) 없다고 인식하는 것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한다.
영화 내적으로도 쓸모가 없다고 폐기되고 사라진 것에 관하여 이야기하고 있고, 영화를 제작한 형식 자체도 마찬가지인 셈이다. 쓸모없는 것은 정말 쓸모가 없는 것인가? 사라지고 떠난 자리에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은가? 그렇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저 우리들이 가진 생각의 한계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이런 면에서 볼 때 이 영화는 영화의 ESG를 표방하는 셈이기도 하다. 쓸모가 없다고 여기는 휴대폰 카메라로 집요하게 가능성을 연구한 결과물은, 어글리 미학, 로우파이, 정크 아트와 같은 파장에 속해 있는 듯하면서도, 때로는 초기 영화 필름의 인상을, 때로는 유화의 한 장면 같은 인상을 남기며 새로운 미학의 가능성을 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흐릿한 화면이 주는 장면들은 유사한 화면들이 끝없이 이어진다는 단조로움을 낳는다. 이 지점에서 큰 효과를 발휘하는 것이 음악이다. 이 영화의 음악은 영화의 분위기를 함께 만들어내는 게 아니라, 우리가 각 장면을 받아들일 분위기로 인도해준다.
일찍이 여름 블록버스터는 소비와 체험의 극대화를 겨냥해 왔고, 현 영상문화의 주류로 부상한 숏츠 류 역시 빠른 소비와 반응을 목표로 하며 맥락을 같이 하고 있다. <마른 잎>은 영화가 어떻게 지각과 감각의 세계를 확장할 수 있는지, 그럼으로써 어떻게 예술로서 지속될 수 있는지를 묻는다. 그 물음이야말로 영화제에서 만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스펙터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