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영작 리뷰

시민평론단

<그저 사고였을 뿐> : 인간이기 위해

By 이영인
  한 남자가 차로 개를 친다. 죽일 의도는 아니었다. 한밤중의 어둠에서 갑작스레 튀어나온 개를 피하지 못했을 뿐이다. 조수석의 아내와 운전석의 남자는 스스로 죄를 사하려 든다. 이것 또한 신의 뜻이며, <그저 사고였을 뿐>이지 않은가. 하지만 뒷좌석의 어린 딸은 속지 않는다. 개는 신이 아니라 당신이 죽였다는 것을 목격했으므로.

  오프닝을 좀 더 확장해서. 믿음이라는 구실 하에 부득이한 것으로 취급되는 폭력이 있다. 자파르 파나히 감독은 삶과 영화로 이란 정부의 ‘부득이한’ 억압에 저항한다. 그의 신작 <그저 사고였을 뿐>은 국가 폭력이 남긴 상흔을 쫓으며, 인간을 규정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관한 물음을 던진다.

 

  도로 위의 개를 바라보는 또 다른 운전자가 있다. 남자가 사고 직후 들른 정비소의 노동자, 바히드다. 바히드는 남자의 의족 소리를 듣고, 그가 자신을 고문했던 정보국 요원이라 의심한다. 카메라는 아래를 내려다보고, 장애물이 프레임을 가린다. 영화는 바히드가 되어 그를 관찰하고 쫓는다. 오프닝을 이끌던 남자는 순식간에 객체로 전락한다. 현실 대신 영화가 피해자에게 힘을 싣는다.

  개가 차에 치일까 자꾸만 돌아보던 바히드는 남자를 향해서는 거침없이 엑셀을 밟는다. 이런 사람이 바히드 말고도 여럿 있다. 영화는 그들이 왜 남자를 보고 발작적으로 행동하는지 보여주지 않는다. 하지만 트라우마라는 것은 주워 담을 새도 없이 줄줄 새어 나오는 것이라, 관객은 대사를 통해 그들의 고통을 허투루 짐작하게 된다. 그들은 고문 당시 시각이 차단되어 있었기에 청각, 후각, 촉각에만 의존하여 남자의 신원을 추측한다. 어떤 감각은 기어코 떨쳐낼 수 없다. 이들은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소리치지만, 마디마디는 절규로 빽빽하다.

 

  영화에는 이란 독재 정권의 현재가 단편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공권력은 막강하고 법치는 명목이다. 보안 요원은 시민에게 현금을 요구하고, 위급한 임산부는 직계 가족이 없어 출산을 거부당한다. 누구를 위한 법인가? 누구를 위한 규범이고 체제인가? 정의는 누구의 것인가?

  바히드에 의해 모인 하미드와 시바가 피해의 기억을 안고 대치한다. 우리를 고문했던 요원을 개인으로 볼 것이냐, 체제로 볼 것이냐. 체제라는 것은 실체 없는 허상이다. 그런 건 인간에 우선할 수 없다. 국가와 집단에 의한 폭력은 이 사실을 외면했을 때 발생한다. 시바가 그들과 같은 논리로 인간을 바라봐서 되겠느냐 한다. 하지만 하미드는 분노한다. 그들은 체제에 의해 억압당했으므로 체제를 훼손하지 않고서는 원한을 풀 수 없다. 

 

  다시 개의 이야기로 돌아와서. 개를 죽인 것은 신이 아니라 남자다. 그 사실을 똑바로 바라본 이는 어린아이다. 선과 도덕은 인간의 본능에 가까운 감각이다. 정의, 체제 맹신, 권력에 대한 복종은 후천적이고 인위적인 사고 체계다. 인간됨을 지향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인간됨은 어디에서 발생하는가? 영화는 바히드의 손과 입을 빌려 답을 제시한다. 응축되어 있던 인간의 아름다움은 영화 끝에 다다라 폭발한다. 

  국가 폭력은 우연적 사고가 아니다. 실수라 부를 수 있는 일은 영화 초반, 아이가 정비소에서 불을 켠 일 같은 것이다. 남은 사람들을 두 눈 똑바로 뜨고 보라. 내가, 우리가, 당신이, 인간임을 잊지말라. 당신은 엔딩 이후를 어떻게 상상하는가? 그 모든 일에도 불구하고 자파르 파나히가 선택한 저항은 영화를 만드는 일이다. 이야기 밖의 관객은 감히 박수로 응답해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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