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평론단
어떤 분야에서든 정점에 올랐을 때, 몇몇 인간들은 자신을 신격화하거나 영생을 얻고자 하는 욕망에 빠져드는 걸 우리는 역사 속에서 익히 목격해 왔다. 정치에서는 독재자가 국민에게 추앙받기를 원하여 그에 대한 우상화가 진행되고, 예술가는 자신의 작품을 남기는 것으로 일종의 영생을 추구할 터이다. 물론 전자의 욕망은 매우 불손하기에 후자의 경우와 직접적으로 비교하기는 어폐가 존재한다. 그럼에도 이 영화를 빌어 이야기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개별적 욕망이 결탁하거나, 더 큰 권력이 굴종을 요구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그 예시를 영화 <공화국의 독수리>(2025)를 통해 살펴볼 수 있다.
3년 전, 영화제에서 상영되었던 <보이 프롬 헤븐>(2022)을 통해 종교와 정치가 결탁하여 타락한 세계의 이면을 선보였던 타릭 살레 감독은 이 영화에 이르러 비판의 칼날을 이집트의 독재정권을 향해 명확히 겨누고 있다. 허구의 영화 속에서 그는 장기 집권 중인 엘시시 이집트 대통령의 이름을 캐릭터에 있는 그대로 명명한다. ‘스크린의 파라오’라 불리는 이집트의 대배우 조지 파흐미(파레스 파레스)는 엘시시 대통령의 전기영화 출연을 강요받다 그를 연기하기를 받아들인다. 영화업계에 상징적 위치에 군림하는 그의 곁에는 정부 측 인사인 만수르 박사(아미르 웨이키드)가 검열과 감시를 위해 늘 뒤따른다. 조지는 대통령과 닮은 모습으로 분장하지만, 그 분장조차 현장에서 검열당한다. 이유는 권력자들이 ‘스크린의 파라오’ 자체인 그의 아우라를 원하기 때문이다. 스타의 후광을 빌어서라도 파라오의 모습에 다가가고자 하는 권력자가 얼마나 무능한 존재인지를 단박에 느끼게 하는 예리한 묘사 중 하나이다.
영화는 익히 봐온 독재와 검열의 모티브를 영화 제작에 관한 드라마로 중반까지 끌고 오다가, 후반부에 이르러 급격한 반전을 보여주며 장르를 뒤바꾼다. 줄곧 파편화되었다고 생각된 장면들은 끝내 감시와 검열의 감각으로 수렴된다. 카메라가 대배우인 조지의 뒷모습을 반복해서 보여주는 것과 정권의 실세인 만수르 박사가 관조하듯이 현장들을 바라보는 쇼트들이 마치 연결된 의미처럼 다가오는 이유이지 않을까. 스크린과 포스터에서 익히 마주하는 배우의 얼굴이지만, 감시와 검열은 예술혼을 불태우는 그의 뒷모습을 겨우 뒤쫓게 할 뿐이다.
동시에 그를 감시하고, 영화 제작과 정치판과 민중의 삶을 멋대로 좌지우지할 수 있다 믿으며 정권의 실세는 그가 나타나는 거의 모든 현장에서 연출가 행세를 한다. 경계를 멋대로 넘나들며 파괴를 일삼는 자를 보고 있자면, 예술과 우리의 삶이 얼마나 취약한지 깨닫게 된다. 누구에게 연출 권한이 주어지느냐에 따라 우리를 풍족하게 할 수도, 파괴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영화 속 상상의 세계와 독재정권의 손아귀에 있는 세상은 끝내 중첩되어 삶과 예술의 유약함을 아프게 드러낸다.
스크린의 파라오라 불리는 대배우든, 자신이 파라오라 믿는 독재자든, 혹은 역사 속에서 파라오라 불렸던 존재들이든, 그들 모두 잃어버린 남성성과 역사의 뒤안길 앞에서 무력하다. 파라오는 이미 오랜 역사 속의 신화로 축소되었고, 대배우는 나이가 든 채로 무기력한 남성성에 대해 지적받는다. 독재자는 나이 든 배우와 신화 속 상징을 겨우 빌어서만 자신을 과시할 수 있는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파라오가 되고자 하는 이의 덧없는 욕망은 현시대에도 여전히 영화 안과 밖에서 씁쓸함과 분노를 일으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