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평론단
임신중단을 주제로 만든 영화의 카테고리를 만들 수도 있다. 원하지 않는 임신으로 고통을 겪는 주인공은 가임기의 젊은 여성이라서 비슷한 영화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이슈는 좌표평면의 엑스축과 와이축이 교차하는 지점처럼 자릿값이 있다. 어느 때에 어떤 나라의 이야기이냐에 따라서 인물들의 행동은 다르게 펼쳐진다. <지우러 가는 길>은 2025년 대한민국이 배경이다. 현재의 법과 제도가 규정하고 허용하는 임신중단의 범위가 있다.
고등학생 윤지가 임신을 했다. 상대는 유부남 담임교사 종성이다. 윤지는 아이를 낳으면 자신에게도 가족이 생길 것이라고 믿고 있다. 종성은 열흘째 학교에도 나타나지 않는다. 윤지는 임신을 중단하면 종성이 돌아올 것으로 생각해서 약물을 구하려고 한다.
2019년 낙태죄는 헌법불합치가 결정되어서 형사처벌을 받지는 않지만 임신중단에 대한 의료보험 혜택은 받을 수가 없다. 2020년에는 미성년자 의제강간죄의 나이가 13세에서 16세 미만으로 바뀌었다. 윤지는 고등학교 1학년이므로 본인이 원해서 이루어진 관계라고 하여도 성인 남자는 범죄자가 된다. 이 영화를 보면서 생각나는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정치적인 것이다’라는 페미니즘의 구호는 감성적인 문구가 아니라 논리적인 도출에 가깝다.
룸메이트 경선은 인터넷에서 구입한 불법 약물로 하혈을 하는 윤지에게 ‘정상적인’ 방법으로 할 수 없냐며 병원에 동행한다. 그러나 병원에서 미성년자는 부모의 허락이 없으면 시술을 받을 수도 없다는 말을 듣고 돌아온다. <지우러 가는 길>이 뛰어난 이유는 그다음 이야기가 암울하거나 답답하게 펼쳐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윤지와 경선은 ‘정상적이지 않은’ 여러 가지 방법들을 보여준다. 경선은 친구이자 조력자이자 보호자로서 역할을 한다. 이런 상황에서 관객을 울리기는 쉬운데 유재인 감독의 시나리오와 연출과 배우의 연기는 관객들을 웃게 만든다.
종성의 아내 민영과 윤지의 대화 장면은 또 다른 장르처럼 영화를 풍부하게 한다. 민영은 아는지 모르는지 알지만 모르는 척하는 것인지 복잡한 심리를 보여준다.
프리미어 상영을 앞두고 인사를 하는 시간에 감독님은 "이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도, 싫어하는 사람도 생길 수 있을 텐데 좋아하는 사람들이 이겼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어떤 우려를 하는지 알 것 같다. 미국에서는 헌법에 보장된 낙태의 권리가 트럼프 취임 이후에 폐지되었고, 그들은 지금 정신적인 내전을 치르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임신중단은 이데올로기의 지배를 받는 주제이기 때문에 논쟁적일 수밖에 없다. 이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더 많아지기를 바란다.
윤지와 경선이 학교의 정문이나 건물의 현관문으로 다니는 씬은 등장하지 않는다. 반복해서 담을 넘고 창문을 넘어서 출입한다. ‘정상성’이 문을 걸어 잠가도 갈 길을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