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평론단
이라클리의 딸 리자는 갑자기 편지 한 통을 남기고 사라진다.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다는 의외성은 아버지 이라클리를 움직이게 만들고, 리자와 함께 작업을 했던 레반과의 동행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낯설게도 레반의 이미지는 화면 속에 없다. 음성으로서, 그리고 레반의 목소리에 반응하는 이라클리로 인해 그가 거기 있음을 확인시켜줄 뿐이다. 소실된 것은 리자만이 아니었다. 그들이 리자를 찾아 이동하며 만난 사람들 또한 목소리로서 존재하곤 한다. 하지만 인물들은 놀라지 않는다. 사라진 것들이 그 자리에 있다는 것은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으나 확실하다. 확인할 수 없으나 거기에 존재했고, 존재한다.
이러한 보이지 않는 세계의 구현을 위해 영화는 의도적으로 낮은 화질의 화면을 구성한다. 화면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표정, 집의 형태 등은 흐릿하며, 중간중간 갑작스럽게 낮아지는 화질과 조명은 ‘보여주는 것’을 제한함으로써 보이는 것의 불확실성을 강조한다. 하지만 그 불확실성이 확실함으로 정정되었을 때 다가오는 것은 걱정과 안도감이다. 영화가 구축한 ‘보이지 않는다’는 것과 ‘여기에 있다’라는 두 가지 사실이 모두 가능한 세계에서 이런 상반된 감정이 동시에 들 수 있다는 것도 지극히 자연스럽지 않은가. 그래서 카메라는 화면에서 사라지는 것과 남는 것을 담는다. 프레임 속에 있던 인물은 곧 화면 밖을 떠나고, 카메라는 남아있는 공간과 사물들을 응시한다. 또 멈추어진 프레임 속으로 인물이 들어온 뒤 카메라는 그를 붙잡듯 따라가고, 인물의 이동이 정지되었을 때 카메라도 멈춘다. 하지만 이내 인물은 화면 밖을 떠난다. 가로와 세로로 움직이는 트래킹숏의 진행으로 영화는 동력을 만들고, 물소, 강아지, 산, 강, 바람으로 조지아의 한적한 풍경을 그린다.
화면 속에 남아있던 것들은 축구장의 나무 골대, 도중에 만난 강아지들, 소들, 무성한 풀, 산, 잎들이다. 수많은 이미지들은 얼핏 비슷하지만 똑같지 않다. 이러한 무수한 차이와 반복은 각자에게 개별성을 부여하며 각 장소 및 대상들이 범주화되어 인식되는 것을 지양하고 생동감있게 화면 속에서 살아남도록 한다. 특히 영화 후반부에 등장하는 몇 가지의 선형적인 이미지들은 살아있음을 증명이라도 하듯 선명하고 고요하게 화면 속에 서 있다.
영화의 초반부 이라클리가 칠판에 그렸던 선과 원을 기억한다. 선은 축구장의 골대를 대신하는 나무로, 들판에 핀 꽃줄기로서 다시 나타난다. 또 이라클리와 레반이 탄 차는 곳곳에서 만난 사람들의 안내에 따라 선형적으로 이동한다. 하지만 결국 그들이 도착한 곳은 원점이다. 작은 지점들마다의 선형적인 움직임은 멀리서 보았을 때 원을 그리며 운동했던 것이다. 이런 회귀의 움직임은 갔던 길을 되돌아오고, 지나온 길을 다시 돌아보는 이라클리의 뒷모습에 남아있다. 결국 소실에서 시작된 이야기의 끝은 그들이 거기에 존재함, 즉 생으로서 발견됨을 말한다. 틀림없이 찾게 될 리자의 집처럼,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알아채지 못할 그 차이를 알아차리는 눈을 뜨게 되는 것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