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평론단
죽음은 끝이 아니라, 인간을 다시 바라보게 만드는 문턱이다. <르누아르>를 더욱 흥미롭게 감상하는 방법 중 하나는 감독의 전작 <플랜 75>와 이 영화를 연속선 위에 두고 읽어내는 것이다. 하야카와 치에 감독은 언제나 죽음의 경계에서 인간의 존엄을 응시한다. <플랜 75>가 노년의 미치를 통해 사회가 어떻게 죽음을 제도화하는지를 드러냈다면, <르누아르>는 11살 소녀 후키의 시선을 따라 죽음을 감각하는 과정을 묵묵히 기록한다. 두 영화는 시공간적으로 전혀 다르지만, 만약 후키가 세월이 흘러 노년의 미치가 된다고 상상한다면 어떨까. 이 글은 그 가정을 바탕으로 한다.
<르누아르> 속 후키는 내밀한 세계에서 가족의 부재와 상실을 체험한다. 감독은 이를 직접 드러내지 않고, 일상의 빛과 공기, 미술 작품(감독은 제목의 르누아르가 큰 의미가 없다고 한다), 음악 같은 감각적 요소로 치환한다. 관객은 이런 간접적 표현을 통해 후키의 감정을 공유하며, 죽음이 단순한 공포가 아니라 삶을 이해하는 성장의 과정임을 체험한다. 이러한 감각은 훗날 <플랜 75>의 미치가 사회 제도의 냉혹함 속에서도 존엄을 붙잡으려는 태도의 밑바탕이 된다고 볼수있다.
<플랜 75>의 미치는 사회가 강요하는 효율성과 무관심 앞에서 최소한의 존엄을 지키려는 인물이다. 만약 그가 후키의 미래라면, 이미 오래전부터 죽음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법을 배운 셈이다. 후키의 감각은 노년의 미치 안에서 다시 살아나고, 두 인물은 세대를 넘어 하나로 이어지는 연속성을 형성한다. 이 지점에서 하야카와 치에의 세계관은 선명해진다. 죽음은 종말이 아니라, 존엄을 증명하는 또 다른 계기라는 것이다.
형식적으로도 감독은 일관된 미학으로 두 영화를 연결한다.<르누아르>는 버블경제기의 화려함과 그 이면의 공허를, <플랜 75>는 절제된 카메라와 침묵의 리듬으로 근 미래 사회제도의 냉혹함을 형상화한다. 서로 다른 시대와 미장센에도 불구하고, 두 작품은 죽음을 직접적으로 보여주지 않고 여백과 잔향 속에 남긴다. 이 ‘여백의 미학’이야말로 하야카와 치에 영화의 핵심이다. 또한 두 작품은 설명을 최소화하고, 관객이 스스로 의미를 채워 넣도록 유도한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영화의 침묵은 결핍이 아니라 사유의 공간이며, 그 공간 안에서 관객은 죽음과 존엄의 문제를 스스로 감각하게 된다.
<르누아르>는 상실과 성장의 이야기다. 후키의 미묘한 감정의 파동은 세월이 흘러 미치의 선택으로 이어진다고 가정할 때, 감독의 질문은 한층 뚜렷해진다. “죽음을 경험한 인간은 어떤 방식으로 존엄을 지켜내며 살아가야 하는가.” 하야카와 치에는 이 질문을 제도와 사회, 기억과 감각이라는 두 층위에서 끊임없이 변주하며, 죽음을 넘어선 삶의 지속 가능성을 탐구한다.
결국 영화는 죽음을 어둠으로 그리지 않고, 빛의 여운 속에서 포착한다. 그것은 곧, 죽음을 통과한 이후에도 삶을 이어가는 인간의 내구성을 증명하는 영화적 공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