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평론단
조지아의 낯선 풍경들이 마치 다양한 화풍의 그림으로 가득한 미술 전시장에 들어가 관람을 하고 나온 듯 세 시간이라는 시간이 그렇게 길게 느껴지지 않았다. 쇼펜하우어가 “실제적인 목적과 강제로부터 해방된 예술만이 관조와 심원한 몰입으로 이끌어간다”라고 말한 것에 비추어보면, 이 영화는 바로 그 지점에 맞닿아 있음을 알 수 있다. 유일한 이 영화의 목적인 딸을 찾아 나서는 아버지의 여정이 영화에서 크게 느껴지진 않기 때문이다. 그저 안개에 휩싸인 마을이 나타났다가 다시 안개 속으로 사라지듯 목적은 드러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하고, 그 안에서 영화는 우리의 의식 속을 조용히 떠다닌다. 벌판에 혼자 있는 망아지와 송아지, 웅덩이에 들어간 개와 풀밭에 누워 있는 개. 뭉개진 화면처럼 느껴지듯 저해상도의 오래된 필름 같은 화면들은 그게 나의 기억 속으로 자리 잡는 순간 똑같이 희미해진다. 그게 아무리 뚜렷한 이미지라도 시간이 지나면 어차피 기억 속에선 뭉개지기 마련이라는 듯 말이다.
감독의 전작과 마찬가지로 이 영화도 해설이 사건의 전개와 인물들의 행동을 설명한다. 그래서 소설적 전개라기보단 오래전부터 이어져 온 이야기에 가깝다. 소설과 달리 이야기는 경험을 통해 구전되며 바로 앞에 들어주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듣는 사람은 그 이야기에 몰입되기 마련이다. 이야기에 몰입된 아이들이 ‘그래서 그래서 그다음엔 어떻게 됐는데?’ 궁금해하지만 그건 이야기하는 사람에 따라 달라지기도 하고, 듣는 사람에 의해 새롭게 구성되기도 하면서 새로운 세대로 이어진다. 영화 속 프레임 안에는 보이지 않지만 여기 사람이 있다고 이야기하고, 아버지가 관객의 눈에는 전혀 보이지 않는 사람들과 대화를 한다. 보이지 않는다고 없는 것은 아니라는 건 그게 이야기 속에 있어서 가능한 일이다.
자꾸만 이 영화 속에 뭐가 숨겨져 있지, 도대체 이 장면을 찍은 감독의 의도는 뭐야 생각하며 온 감각을 몰두하고 정보를 얻으려 한다면 길고 지루한 이야기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감독은 우리에게 정신을 바짝 세울 필요도 긴장할 필요도 없다고 이야기한다. 다만 빠져들면 된다고 말이다. 그저 흐릿한 눈으로 가끔 하품도 해가면서 바라보라고, 그리고 이 영화 속에 담긴 이야기가 이어질지 안 이어질지는 관객의 몫이라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