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평론단
영화는 올림픽 발상지인 그리스의 올림피아, 헤라 신전에서 여 사제가 태양 광선을 채화 하여 불을 붙이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그리스 시대부터, 불은 성스러움의 상징으로 숭배 되었으며, 그리스에서의 불의 채화는 올림픽이 시작됨을 알리는 것이다. 이 첫 장면은 2024년 파리 올림픽을 위한 성화 채화였다. 인류의 대 축제가 될 2024 파리 올림픽이 열리는 것이다. 올림픽은 인류가 한자리에 모여 스포츠의 힘을 통해 세계 평화와 인류의 단결을 촉진하기 위한 축제로, 온 인류 모두가 함께 즐겨야 하는 축제이다. 한데, 2024년 파리 올림픽이 과연 인류 모두가 함께 즐기는 축제가 될 수 있을까?
영화에서는 파리 올림픽과 관련된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나온다.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진행 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주최 측의 관리자들과 참여 선수들이 한 부류라면, 또 한편에는 이를 보기 위해 참여하는 관중들이 있다. 또 다른 편에는 이 올림픽에서 배제되는 사람들이 한 부류가 있고, 여러 이유로 올림픽 개최를 거부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 모든 부류의 사람들이
올림픽이 내거는 기치 처럼, 모두 함께 올림픽을 축제로서 즐길 수 있을까?
영화의 주인공, 노르망디에 사는 블랑딘은 수영 경기를 보기 위해 파리를 방문한다. 블랑딘은, 번 아웃의 장애를 극복하고 다시 수영에 도전하는 프랑스 여자 수영 선수 중 한 명의
팬이기에 그녀의 수영 경기를 보고 싶어한다. 관중의 부류에 해당하는 것이다. 한데, 블랑딘은 큰 백 팩을 소지했다는 이유로 예약되어 있던 수영 경기장에서 입장이 거부된다. 또한 그녀는 세느 강에서 열린다고 예고된 수영 경기를 보기 위해 강변에 갔지만, 세느 강의 수질 오염 문제가 심각하여 세느 강 에서 의 경기는 취소되었다는 소식을 뒤늦게 접하게 되고 좌절한다. 블랑딘은 올림픽 경기를 보고 싶어하고 관중으로서 참여해 즐기고 싶어하는 부류였지만, 주최 측의 규칙과 실수 등으로 올림픽에 참여할 수 없게, 배제되는 부류로 튕겨져 나가게 되는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그녀가 숙소로 정한 호스텔에서는 겨우 이틀을 묵었는데, 생일이 지났다는 이유로 다음 날 부터 숙박을 거부 당한다. 블랑딘은 축제에서 계속 거부 당하는 신세다. 천만
다행인 것은, 10 여 년 간 만난 적도 없던 파리에 사는 이복 언니와는 연결이 되어, 언니의 집 소파에서 숙박을 할 수 있게 된 것? 하지만 이복 언니의 딸, 즉 조카를 돌보다가 언니의
전 남편과 연결되는데, 그는 파리 올림픽 개최를 반대하는 운동가였다. 그는 올림픽을 이유로 12,000여 명의 노숙자를 파리에서 쫓아내는 일 때문에 올림픽을 반대하는 시위를 하고, 블랑딘은 우연치 않게 이 시위에 연루되어 경찰에 체포까지 되는 처지가 된다. 그녀는 올림픽을 제대로 즐길 수 있을까?
영화는 블랑딘을 2025 파리 올림픽에서 배제되는 자로 느끼게 한다. 파리의 시설들은 그녀에게 위압적으로 보이고, 그녀를 혼란스럽게 한다. 그녀와 접촉하는 사람들도 그녀에게 일방적이기에 폭력적이다. 그런 사람들과 장소에서 블랑딘은 올림픽이나 사람들과 즐거운 랑데뷰를 할 수 있을까? 영화는 블랑딘에게 일어나는 예상치 못한 조우들을 통해, 그녀에게 여름의 랑데뷰를 제공한다. 물론 이런 랑데뷰는 블랑딘의 품성, 즉 어려운 일을 겪지만 이를 침착하게 받아들이면서도 자신의 입장과 요구를 끝까지 놓지 않는 덕분에 성취되고 이어진다. 게다가 그녀의 부드러운 친화력도 한 몫 거든다. 상대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면서, 자신의 생각이나 처지는 솔직하게 표현하는 블랑딘의 자세가 아름다운 랑데뷰를 가능하게 하고 이어가는 것은 아닐까?
아름다운 랑데뷰는 두 존재가 온전해야 가능하다. 자기 자신이라는 주체와 상대가 되는 타인이라는 주체가 온전하게 서로를 인정하고 받아들일 때 가능한 것이리라. 파리 올림픽의 성공을 위한다고 12,000명의 노숙자들을 쫓아내는 올림픽 주최 측이나, 이런 면 때문에 올림픽 자체를 거부하는 방식의 주체들에게는 아름다운 랑데뷰가 불가능하리라.
이 영화에서 얻는 시각적 해방감은 두 장면에서 온다. 하나는 랑데뷰를 얻은 두 남녀가 함께 오토바이를 타고 질주하는 장면이고, 또 다른 하나는 홀로 수영을 마음껏 즐긴 후 바다를 바라보는 블랑딘의 뒷모습이다. 랑데뷰와 홀로 됨의 자유, 우리에게는 두 가지가 다 필요한 듯 하다.
이 영화는 발렌틴 카디크 감독의 첫 장편 데뷔작이다. 폭력과 차별 그리고 혐오를 부추기는 오늘날의 세계에서, 블랑딘이라는 유난스럽지 않고 부드러운 인물과 함께, 아름다운 랑데뷰를 기대하게 한 감독의 탄생은 시네필로서는 참으로 기쁜 일이다. 그녀와의 랑데뷰가 이어지길 바란다.
이 영화를 영화제에서 보고 나니, 우리는 30회 부산 국제영화제에 참여하며 이와 같은 아름다운 랑데뷰를 기대하고 있음을 다시 느끼게 된다. 이 영화 <여름의 랑데뷰>는 우리에게 이런 설렘을 주는 희망적이고 우아한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