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영작 리뷰

시민평론단

<멜트다운> : 진실은 그저 어린아이 눈높이만큼

By 백동현

<멜트다운> : 아이의 눈높이만큼의 진실

 

  마누엘라 마르텔리 감독의 <멜트다운>은 미스터리의 외양을 하고 있지만, 끝내 답을 내놓지 않는다. 한나는 늦은 밤 이네스의 사촌 오빠와 함께 숙소를 나선다. 날이 밝아도 한나는 돌아오지 않고, 함께 나갔던 사촌 오빠는 이미 돌아와 있다. 그날 밤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영화는 보여주지 않는다. 누군가의 회상이나 대사로 들려주지도 않는다. 이 빈칸은 실수가 아니라 설계다. 영화는 관객에게 어린 이네스가 볼 수 있는 만큼만, 딱 아이의 눈높이만큼만 진실을 허락한다.

 

  그래서 화면 곳곳에 퍼즐 조각이 흩어져 있지만, 결정적인 한두 조각은 늘 빠져 있다. 화산에 가 보고 싶어 하던 한나와 위험하다며 말리던 리조트 사람들, 한나에게 유독 관심을 보이다가 정작 결정적인 대목에서는 입을 닫은 사촌 오빠, 전지훈련단의 유일한 여자 선수로서 또래에게 은근히 놀림받던 한나, 필요 이상의 신체 접촉으로 석연치 않은 기류를 남기는 코치, 그리고 한나가 집을 나간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는 코치의 반박 속에 비치는 엄격한 어머니. 조각은 많지만 어느 것도 그림을 완성하지 못한다. 관객은 사고인지, 누군가의 잘못인지조차 끝내 알 수 없다.

 

  이 결핍은 곧 영화 주제가 된다. 수색 도중 이네스의 집안은 호텔에 해가 될까 봐 사촌 오빠를 서둘러 리조트 밖으로 내보낸다. 리조트 사람들은 물론 코치와 한나의 어머니까지, 어른들은 저마다의 사정으로 이네스에게 입단속을 시킨다. 소니아 아줌마나 한나 곁에서만 잠드는, 여전히 누군가의 품이 필요한 아이는 그 요구에 순응한다. 감독은 GV에서 아이의 침묵이 아직 진정한 민주주의에 이르지 못한 칠레의 그늘이라고 말했다. 관객이 끝내 쥐지 못하는 퍼즐 조각은, 이네스가 삼켜야 했던 말과 같은 자리에 놓여 있다.

 

  통역 역시 흥미로운 장치이다. 딸의 실종 소식에 독일에서 급히 날아온 한나의 어머니는 코치와는 독일어로, 칠레 사람들과는 영어로 말한다. 영어를 모르는 이들을 위해 그 말을 중간에서 스페인어로 옮기는 것은 이네스의 몫이다. 침묵을 강요받은 아이가 어른들 사이에서 말을 옮기는 통로가 되는 셈이다. 게다가 영어는 두 사람 누구의 모국어도 아니다. 어머니가 묻는 말과 이네스가 전하는 말 사이에는 늘 미세한 틈이 생기고, 그 틈 어딘가에서 진실은 조금씩 흘러내린다. 통역은 소통의 장면이면서 동시에 무엇을 말하지 않을지 고르는 장면이 된다.

 

  영화를 소개하는 시놉시스나 GV에서 감독이 언급한 당시 칠레 역사가 없었다면, 이 영화가 겨누는 주제 의식을 곧바로 알아차릴 관객은 많지 않을 것이다. 칠레는 군사 독재 이후 비교적 성공적으로 민주화를 이뤘다고 평가받는다. 하지만 그 뒤로도 사회 곳곳에는 갈등의 불씨가 남아 있었다. 이를 저마다 다른 이유를 내세우며 한나의 수색을 더디게 만드는 인물들로 영화는 상징한다. 그러나 빠진 조각이 워낙 많다 보니, 그 상징이 이네스의 작은 세계 너머까지 닿지 못한다. 그래서 때로는 모호함이 긴장보다 피로로 다가오는 순간도 있다.

 

  그럼에도 <멜트다운>의 선택은 영리하다. 끝내 확실한 것은 마지막에 모습을 드러내는 한나의 붉은 목도리 하나뿐이다. 새하얀 눈과 투명한 얼음은 모든 것을 덮고 얼려 두지만, 봄이 오면 녹아 숨겨 둔 것을 드러낸다. 독재가 끝났다고 선언된 시대에도 진실은 여전히 어른들의 등 뒤에 숨겨져 있었고, 아이들은 보이는 만큼만 보고 들은 것을 삼키는 법부터 배웠다. 영화가 끝까지 말해주지 않는 이유는 그 시대가 결국 진실을 끝까지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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