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영작 리뷰

시민평론단 - 비전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 비켜나는 삶

By 김예지
조용한 시골 마을에서 유년 시절을 보낸 ‘은율’은 20대가 되어 서울로 상경 했다. 눈을 감고 집중을 하면 어느 미래의 시점에 본인에게 일어날 장면을 볼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 그녀. 독특한 건 이 기이한 능력이 아무 곳에서나 발휘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유년을 보낸 고향 마을 어귀 입구에 있는 벤치에 앉아 있을 때에만 가능하다.서울에 있는 벤치란 벤치는 다 앉아 봤지만 미래는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보이지 않는 미래를 보기 위해 고향으로 향한다. 헤어진 전 남자친구가 건네준 로베르트 발저의 <산책자>라는 책 한 권을 들고 찾은 고향 마을. 은율은 자전거를 타고 마치 순례자처럼 마을 여기저기를 둘러본다.

 

하지만 가족끼리 가까이 지낼 만큼 친분이 있었던 고향 언니는 자신을 이상하게 생각하며 퉁명스럽게 대하고, 한때 친했던 친구는 자신을 보고도 모른척하며 도망가기에 바쁘다.​ 은율은 자신에게 상처를 준 친구를 마주하자 그 친구의 뒤를 쫓아가 자신에게 사과를 하라며 악을 쓴다. 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무시와 비난 뿐이다. 심지어 무언가에 긁히는 바람에 발바닥에 생채기가 나고 만다. 흐르는 피를 물로 씻어내는 은율. 이처럼 마음에 남은 생채기도 씻어낼 수 있으면 좋으련만. 저수지에 살고 있을지도 모르는 물고기가 돌에 맞을까 봐 저수지에 돌멩이를 던지는 것도 하지 못하게 말리는 은율의 마음. 그녀는 보이지 않아도 보이고 겪지 않아도 느껴지는 ‘통증’을 간직하고 있다. 신선 감독은 영화 전반에 상처에 대한 많은 단서들을 제공한다. 이 단서들이 하나하나 공개되고 은율의 심연에 묵혀있던 과거의 기억들이 수면 위로 떠오르는 순간 통증이 폭발하며 은율을 흔들어댄다. 남몰래 써 둔 낡은 노트 한 권. 이미 일어난 일들에 대한 숱한 기록들은 은율을 계속해서 과거로 회귀시킨다. 미래를 보기 위해 고향을 찾아온 그녀지만 그녀는 마주하고 싶지 않은 과거를 마주해야만 한다. 아무리 미래를 볼 수 있는 ‘예지력’을 가졌다할지라도 과거에 일어난 일은 괴롭다.

 

그런 그녀를 찾아온 낯선 여행자. 그와의 만남은 상처뿐인 과거를 털어내고 미래가 아닌 현재를 인식하면서 자신이 그랬듯 비슷한 아픔에 머물러 있는 누군가에게 위로를 건넬 힘이 선사한다. ‘심장을 뛰게하는 힘’, 어쩌면 은율에게 필요한 건 미래를 볼 수 있는 능력이 아니라 그동안 거쳐온 모든 ‘점’과 같은 순간들을 하나의 '선'처럼 계속해서 이어가는 것.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그 일이 아직 일어나지 않았다 할지라도 자신의 삶을 계속해서 지켜나가는 것은 아니었을까.

 밝게 웃는 은율의 얼굴에서 그 어떤 통증과 불안함도 발견할 수 없게 된다. 앞으로 일어날지도 모르는 불행한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미래를 일어날 일들을 확인하기 위해 이 벤치 저 벤치를 전전하던 은율은 이제 없다.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괜찮은 은율이 되었기 때문이다.

 <산책자>의 한 글귀처럼 “은율은 아무도 아프게 하지 않았고, 나를 아프게 하는 사람 역시 아무도 없었다. 은율은 참으로 멋지게 그리고 보기 좋게 옆으로 비켜나 있었다.”

 

신선 감독 특유의 감성으로 녹여낸 영화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은 아름다운 풍경에 아름답게 놓인 영혼을 치유하는 예쁜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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