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평론단 - 비전
때는 바야흐로 2013년, TV 저녁 뉴스에서 제18회 부산국제영화제 개막 소식을 알리고 있었다. 영화제 소식을, 개최 예정도 아니고 개막했다는 소식을, 티켓 카탈로그도 아니고 TV 뉴스로 접하고 있다는 충격. 내가 태어나 처음 TV로 소식을 접했던 부산국제영화제이자, 내 아이가 태어나 처음 맞이하는 영화제였다. 그리고 나는 그로부터 12년간 영화제를 찾지 못했다.
<사랑의 지평선 너머로>의 태영(박송열)과 주미(원향라)는 아이를 갖기로 한다. 넉넉함은커녕 빠듯함에 가까운 살림이지만, 태영은 먹고 사는 건 어떻게든 되고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고 말한다. 중요한 문제가 무엇이냐는 되물음에 두 사람은 빛을 쫓는 전사처럼 먼 하늘을 바라본다.
어떻게든 되지만 쉽게 된다고는 말하지 않았다는 듯이 태영은 배달 노동으로 고군분투한다. 오토바이를 타고 도로를 달리는 동안 그는 끊임없이 움직인다. 때로는 오토바이 없이 낑낑대며 고갯길을 올라가고, 비바람을 맞으며 도로를 질주하기도 한다. 노동하는 사람에게 시간을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소진되는 것이다. 태영의 질주는 생활을 위한 가장의 분투에 가깝다. 영화 초반, 태영은 배달이 잘못되었다는 전화를 받고 오토바이를 되돌려 돌아간다. 이때 카메라는 오토바이를 끌고 허둥지둥 건널목을 건너가는 태영의 모습을 바라보지 않는다. 대신 횡단보도를 황급히 건넌 뒤, 부리나케 질주해 나가는 뒷모습을 바라본다. 이렇듯 영화는 노동의 고단함을 극적인 사건으로 과장하지 않는다. 먹고사는 일이 특별한 순간에만 삶을 압박하는 것이 아니라, 매일의 리듬을 만들어내는 행위임을 반복적인 움직임을 통해 보여준다. 그런데 어쩌나, 육아의 삶이란 퇴근 없는 삶인 것을. 영화는 오토바이를 통해 보여준 운동감을 집안에서 행해지는 조용한(그러나 치열한!) 육아와 교차시킨다. 그리고 그 사이에는 갓난아기를 바라보며 미소 지을 수 있는 숨 고르기가 있다. 노동과 육아의 리듬을 정과 동의 리듬으로 감각하게 하면서 영화는 생활의 무게를 영화적인 형식으로 옮겨 낸다.
이 영화가 특별한 점은 이런 지점이다. 영화는 시선을 빼앗는 고운 화면을 만들기 위해 단장하지 않는다. 아기를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처럼, 사고 역시 태영의 의지나 선택과는 관계없이 일어난다. 영화는 그 현실을 극복의 서사로 바꾸지 않는다. 삶은 혹은 육아는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과정이 아니다. 오히려 문제를 해결할 틈도 없이 다음 날을 맞이하기 일쑤이다. 영화는 그저 움직이고 돌보며 생활하는 그 모습을 보여준다. 어떠한 미화 없이 노동과 육아의 일상만으로, 특별할 것 없어 보이는 생활의 단면들로, 리듬을 짜고 긴장을 만들어내며 영화의 주제를 이야기해 나간다. 눈물 한 방울 없이 노동의 고단함을 이야기하고, 아기를 껴안은 함박웃음 없이도 육아의 행복함을 전하는 것이다.
아이가 태어난다는 것은 사랑하는 존재가 하나 늘어나는 일이면서, 동시에 자신의 삶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범위가 달라지는 일이기도 하다. 언제 쉬고, 무엇을 할지는 더 이상 온전한 자신의 몫으로만 남지 않는다. 사랑은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존재를 내 삶 안에 받아들이는 일일지도 모른다. 〈사랑의 지평선 너머로〉는 그 변화를 거창한 선언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노동도 책임도 예기치 않은 사고들도 모두 안은 채 내일도 맞이해야 하는 삶 속에서, 작은 끄덕임 하나로 우리가 그 시간을 홀로 통과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전한다. 우리의 동지 박송열-원향라 부부에게 축하와 박수를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