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영작 리뷰

시민평론단 - 비전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 산책자의 마음

By 조효정

산책을 나서는 일과 자신을 산책자로 명명하는 행위는 다르다. 산책하는 사람에서 산책자의 마음을 가진 사람으로 나아가는 것. 신선 감독의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2026)은 로베르트 발저의 책 『산책자』를 가져와 주인공 은율의 산책을 따라가는 영화다.

 

은율은 데자뷔처럼 미래의 어느 순간을 보는 능력을 지녔다. 고향인 거제도의 한 벤치에 앉아야만 가능한 일이다. 은율은 헤어진 애인이 선물한 『산책자』를 들고 서울을 떠나, 부모님의 해외여행으로 잠시 빈 고향집으로 내려온다.

 

이름 짓기는 정체성을 규정한다. 똑같이 집을 나서더라도 산책과 여행과 출근은 같을 수 없다. 목적지와 용도가 앞서는 다른 이동과 달리, 산책에서는 걷는 일 자체가 목적이 되기도 한다. 그 길에서 무엇을 만나고 어디에 멈출지는 미리 정해져 있지 않다. 은율은 걷는다. 어릴 때 살았던 집 주변과 동네를 거닐며 여러 사람과 마주치고 대화를 나눈다. 갑자기 나타난 등산객과의 만남처럼 산책길에는 수시로 우연과 돌발이 끼어든다.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을 정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영화라고 할 수 있을까. 거대한 사건만을 ‘일’이라 여긴다면 그럴지도 모르겠다. ‘아직’은 무언가가 일어날 가능성을 남겨두는 부사다. 특별한 일이 벌어지기를 기다리게 하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듯한 시간이 길어질수록 역설적으로 화면에 더 집중하게 한다. 은율의 걸음걸이와 멈춤, 그가 바라보는 곳, 그에게 말을 거는 목소리까지 하나하나 눈에 들어온다.

 

미래를 보는 예지라는 초능력도 영화 속에서는 특별한 사건으로 부풀려지지 않는다. 초능력이 발휘되는 장소는 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벤치이며 비밀로 숨기지도 않는다. 이야기하고 방법을 알려주고 함께 연습까지 한다. 비범한 능력이 평범한 대화와 일상의 풍경 속에 놓인다. 카메라는 고정된 채 은율을 기다린다. 은율이 산책하듯 화면에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로베르트 발저에게 산책은 세상의 중심에서 비켜나 자기 내면을 유랑하고 세상의 작고 초라한 것들을 다정하게 마주하는 의식이었다. 생산성과 효율성을 중심으로 조직된 근대적 주체가 목적에 따라 움직인다면 산책자는 세계가 자신에게 다가오기를 기다리는 사람이다. 은율의 산책 역시 과거의 상실과 미래에 대한 불안을 다스리는 내면의 순례와 닮았다. 바쁜 서울에서는 보이지 않던 미래가 잠시 멈춘 거제에서 보인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은율은 미래를 볼 수 있기에 그것을 보려 한다.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은 불안하고 통제할 수 없다는 무력감은 크다. 은율은 이에 대한 미약한 대응으로 벤치에 앉는다. 미래를 알면 대비할 수 있고 대비할 수 있다면 통제할 수 있을 것 같다. 과연 그럴까. 은율이 보는 미래는 선보다 흩어진 점에 가깝다. 점들은 선으로 이어져 과거와 미래를 만들고 끊임없이 현재에 개입한다.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이미지가 현재를 침범한다. 불안에서 벗어나기 위해 미래를 알려 하지만, 미래를 안다는 사실이 또 다른 불안을 만들어낼 수도 있다.

 

은율은 말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서 문제가 되는 걸까? 뭔가를 해서 문제가 되는 걸까? 실험에 영향을 주는 변수를 미리 계산하고 제거하듯 삶을 통제하려 해도 예상하지 못한 변수는 언제든 나타난다. 유지가 가장 큰 변화이듯,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는 것조차 적극적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는 행위를 ‘하고’ 있는 셈이다. 삶에 개입하지 않으려는 노력마저 삶에 개입하는 선택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디까지 준비하고 막을 수 있을까.

 

과거는 지나갔고, 미래는 오지 않았다.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은 무엇도 확정되지 않았다는 뜻이다. 미래를 알 수 없다는 사실은 불안을 낳지만 동시에 아직 무엇이든 일어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남긴다. 미래를 보기 위해 벤치에 앉던 은율은 어느새 그 벤치에서 다독임을 받고 토닥임을 나눈다. 산책은 미래를 알아내기 위한 일이 아니다. 목적지 없이 평소에 지나쳤던 길을 마음을 내어 걷고 멈춰 서고 눈으로 풍경을 애써 붙잡아 바라보는 일이다. 산책자의 마음으로 걷자. 산책자의 마음으로 앉자. 

BNK부산은행
제네시스
네스프레소
한맥
네이버
CGV
파라다이스 호텔 부산
한국거래소
드비치골프클럽 주식회사
트립닷컴
아이앱 스튜디오
두산트리븐센텀
팔라티움
Ministry of Culture, Sports and Tourism
Busan Metropolitan City
Korean Film Council
BUSAN CINEMA CENT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