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평론단 - 비전
일반적으로 영화에서 미래를 본다는 설정은 거대한 사건을 터뜨리는 동력으로 작동한다. 그러나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은 이 판타지를 고향 마을 길가의 낡은 벤치 위에 조용히 내려놓는다. 그저 벤치에 앉아 두 손을 모으고 눈을 감는 것. 이토록 단순하고 무해해 보이는 행위가 오히려 인상 깊은 이유는, 영화가 판타지를 장르적 쾌감의 볼거리로 소비하지 않고 한 인간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투명한 창으로 활용했기 때문이다.
은율(박한빛나라)이 감각하는 미래는 선형적인 서사가 아니라 흩어진 점들에 가깝다. 정확히 언제 일어날지 모르는 삶의 파편들이 머릿속에 부유하다가, 마침내 그 순간이 도래했을 때에 야 “아, 그때 본 게 이거였구나” 하고 깨닫는 식이다.
이 설정의 묘미는 예지 능력이 삶의 불안을 덜어주지 못한다는 모순에 있다. 미래의 일부를 보면서도 그것이 언제, 어떻게 현실이 될지 알 수 없고 그 흐름을 바꿀 수도 없기에, 은율에게 그 능력은 삶을 대비하게 하는 힘이 아니라 이미 정해진 궤도를 따라가고 있다는 무력감으로 작용한다. 영화는 미래를 아는 자의 고독을 그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한 치 앞도 확신할 수 없어 매일 흔들리며 하루를 건너야 하는 인간의 근원적 불안을 들여다본다.
영화는 이 불안을 극적인 사건이 아니라, 느릿한 걸음의 리듬으로 풀어낸다. 도망치듯 고향 거제로 내려온 은율은 저수지까지 묵묵히 올라갔다 내려오고, 오랜 친구 커플과 둘러앉아 술잔을 넘기며, 길 위에서 우연히 마주친 낯선 여행자에게 위로 받는다.
이 산책의 궤적에는 명확한 목적지도, 상처를 해결하는 방법도, 거창한 구원도 끝내 주어지지 않는다. 다만 걷고, 우연히 마주치고, 잠시 멈추는 무심한 시간 동안 인물의 마음이 미세하게 자리를 옮겨갈 뿐이다. 영화는 상처로부터의 회복이 어떤 목적지에 도달하는 결과가 아니라, 스스로의 보폭을 되찾아가는 조용한 과정임을 거리와 속도의 감각으로 증명해 낸다.
영화의 형식도 그 보폭을 따른다. 큰 갈등이나 사건 대신 벤치와 산책, 느슨한 대화, 무심한 자연 풍경이 이어진다. 카메라는 인물을 몰아붙이지 않고 기다리며, 그 기다림이 그대로 이야기의 호흡이 된다.
전작 <모퉁이>와 <미로>를 통해 일상의 미세한 균열과 인물의 내면을 절제된 형식으로 응시해 온 감독의 태도는, 이 작품에 이르러 한층 유연하고 단단해졌다. 초현실적인 판타지를 끌어안고서도 목소리를 높이지 않는 선택, 초능력이 발현되는 기적의 순간조차 평범하고 건조하게 담아내는 카메라는 판타지와 일상의 경계를 흐리며 이 영화만의 고요한 긴장을 완성한다.
그래서 은율의 손에 들려 있는 로베르트 발저의 『산책자』는 단순한 소품 이상의 묵직한 질감을 지닌다. “나는 아무도 아프게 하지 않았고, 나를 아프게 하는 사람 역시 아무도 없었다. 나는 참으로 멋지게 그리고 보기 좋게 옆으로 비켜나 있었다”라는 문장은, 다가올 미래를 보면서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 쪽으로 비켜 온 은율의 선택과 포개 진다. 방황과 관찰, 고독과 우연이라는 발저의 정서가 영화의 산책 구조에 스며들면서, 인물의 걷는 일과 읽는 일은 같은 리듬으로 흐른다.
영화의 제목이 품은 ‘아직’이라는 단어는 처음에는 다가올 무언가를 두려워하는 불안의 시제로 다가온다. 그러나 은율의 느린 보폭을 따라 걷다 보면, 바꿀 수 없는 미래처럼 보였던 것은 삶 전체가 아니라 불현듯 주어진 몇 개의 장면에 불과했음이 드러난다. 그 틈에서 ‘아직’은 “아무것도 결정되지 않았다”라는, 그러니 지금부터 무엇이든 다시 시작해 볼 수 있다는 ‘가능성의 시제’로 위치를 바꾼다.
결국 그 깨달음은 은율 한 사람의 몫으로 끝나지 않는다. 벤치는 여전히 그 자리에 놓여 있고, 다만 거기 앉는 사람이 달라질 뿐이다. 극장을 나서며 우리가 쥐게 되는 것은 미래에 대한 답이 아니라,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오늘이라는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