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곡사>에서 인물을 표현한 거친 질감은 확실히 깎아낸 듯한 매끈하고 선명한 표면보다 시선이 오래 머문다. 작품은 이 거친 질감을 고유한 미학으로 삼았지만, 아쉽게도 인물의 표정과 감정까지 뭉갠다. 특히 인물의 입술이 움직이지 않는 몇몇 장면에서는 표정을 만드는 얼굴 근육마저 경직되어 대사와 이미지가 따로 논다.
이야기 특성상 관객이 알지 못하는 정보의 상당 부분이 인물의 대사를 통해 전달된다. 그러나 입술과 표정 움직임이 충분하지 않아 누가 어떤 말을 하는지 분간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 여기에 성우들의 목소리까지 극장 안에서 울려 대사가 또렷하게 들리지 않으면서, 몇몇 장면은 영어 자막에 의존해야만 이해할 수 있었다는 아쉬움도 있었다. 작품이 선택한 조형 방식과 음향이 인물의 발화와 감정을 전달하는 통로를 동시에 가로막아 안타깝다.
서사 역시 복잡하게 배열되어, 이 소장이 수의를 입고 등장한 장면부터는 영화를 따라가기 어렵다. 왜 이 소장의 시신이 다섯 번이나 화장했는데도 타지 않는지, 파도 소리와 마른 땅 위의 배, 꼭두 인형과 ‘태워도 태워도 타지 않는 슬픔’이 무엇을 뜻하는지 쉽게 연결되지 않는다. 이 소장의 상상과 과거, 세 인물의 과거와 현재가 반복되는 수수께끼와 복잡한 장면 연결 속에 뒤섞인다. 그 결과 각 장면은 서로 의미를 확장하기보다 따로 떨어진 이미지 묶음처럼 보인다. 관객은 영화 내내 이야기를 따라가기보다 장면을 해독해야 하는 부담을 떠안는다.
<화곡사> 중심에는 슬픔을 품은 한 인물이 죽음 직전 다시 그 슬픔을 마주하고, 해소한 뒤 떠난다는 단순한 이야기가 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화장터 세 인물과 특별한 관계를 맺었던 이 소장이 죽은 뒤 그들을 다시 방문하고, 세 인물의 갈등을 해소시키며 자신도 안식으로 돌아가는 내용이다. 그러나 일반 관객에게 낯선 화장장 전문 지식, 그곳에서만 일어날 법한 사건이 수수께끼처럼 심어지면서 이야기 진입 장벽이 높아진다. 다섯 번을 화장해도 타지 않는 시신이나 꼭두 인형은 그 일에 종사하는 이들에게는 흥미로운 소재일 수 있다. 문제는 그 정보가 인물과 서사 속에 충분히 녹아들지 못한 채 관객이 먼저 풀어야 할 암호로 남는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후반부에 등장하는 꽃상여는 아름답고 애달프며 관객의 마음을 움직인다. 흥미로운 점은 이 장면의 감정이 인물의 표정이나 대사가 아니라 롱숏 안에서 발생한다는 점이다. 버드아이뷰와 롱숏으로 포착한 꽃상여가 곡소리와 어우러져 깊은 몰입을 만든다. 여기에는 제대로 전달되지 못하는 대사도, 굳은 얼굴에서 억지로 읽어내야 할 감정도 없다. 오직 영화적 이미지와 소리만 남는다. 오히려 이 장면이 품은 감정과 이야기는 선명하게 전달된다. 미스터리로 흩어져 있던 이 소장의 존재와 슬픔이 비로소 하나의 풍경 안에서 완성된다.
<화곡사>는 꽃상여 장면만큼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장면을 선보일 가능성을 지녔으면서도, 그 가능성을 과도한 수수께끼 속에 가둔 아쉬운 작품이다. 난해함은 관객이 이해하지 못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이해한 뒤에도 하나의 의미로 소진되지 않을 때라고 본다. 이 작품의 복잡성은 이야기 깊이를 더하기보다 비교적 단순한 이야기를 알아보기 어렵게 감싸는 데만 머문다. 후반부 꽃상여 장면은 이미지와 소리만으로 감정의 깊이를 충분히 전달할 수 있음을 증명한다. 그렇기에 영화가 자신의 가능성을 믿지 못한 채 과도한 수수께끼, 기능하지 못하는 구조, 인물의 표현을 제약하는 거친 질감 속에 스스로를 가둔 선택은 더욱 아쉽다. 꽃상여의 한 장면은 충분히 아름답지만, 그곳에 도착하기까지 이야기의 길은 희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