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영작 리뷰

시민평론단 - 비전

<베일러> : 순환하는 삶과 지겨운 일상

By 김재형

<베일러>(오세현, 2026)는 퇴사한 은주(김슬기)가 창호(우지현)로부터 한 달간의 농사 아르바이트를 제안받고 정읍 시골에서 일하게 되는 내용이다. 제목인 ‘베일러’는 볏짚을 모아 동그랗거나 네모나게 압축하는 농기계를 말하며, 시골의 논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마시멜로를 닮은 커다란 덩어리를 만든다. 농사일이 으레 그렇듯, 은주의 일은 고되다. 밤늦게까지 이어지는 잔업에, 비 오는 날만이 그들의 유일한 쉬는 날이다. 임산부인 은주가 할 만한 작업인가 묻는다면 역시 아니다. 그러나 그 사실에 대해 영화는 크게 관심을 두지 않는다. 영화는 제 몸을 조심해야 할 은주가 고된 작업에 고생할 때 발생할 수 있는 불안감이나 갈등을 다루지 않는다. 그 대신 관심 두는 것은 은주의 임신 사실 그 자체이다. 임신과 번식. 그로 인한 생명의 탄생, 그리고 유한한 삶과 죽음. <베일러>에는 순환하는 삶과 그 속의 지겹도록 버텨야 하는 우리네 일상이 담겨 있다.

 

희한한 일이다. 창호의 말에 의하면 소는 완전히 다 자라면 잘 죽지 않는다. 그런데 은주는 운이 좋은 것인지 머무는 동안에 송아지가 한 마리 태어나고, 다른 한 마리의 소가 죽는 것을 지켜볼 수 있었다. 그뿐이랴. 소 밥을 주던 은주는 우사에 있는 길고양이가 새끼를 낳고, 젖을 주는 순간까지 마주한다. 마을 사람들이 토토라고 이름까지 지어주었던 강아지는 차에 치여 죽었다. 마을 인부 하나는 불의의 사고로 자신이 몰던 트랙터에 깔려 유명을 달리했다. <베일러>에서 태어나고, 죽기는 사람이든, 동물이든 맞이하는 공통의 순간이다. 당연한 듯 가만가만히, 소름 끼치도록 냉정하게 흘러가는 자연에서 은주는 무엇을 느꼈을까. 영화 초반 친구와의 통화에서 임신 사실을 밝히던 은주의 목소리는 무미건조하게 느껴진다. 그리고 한 달간의 정읍 생활이 갈무리될 때쯤 한 고깃집의 화장실에서 그녀는 임신한 배를 조심스럽게 매만진다.

 

살아 있다는 것은 어쩌면 고통이 아닐까. 어디가서 살아 내기는 해야 하고, 그러려면 일을 해야 한다. 일은 지겹게 긴긴 시간을 떼우기 위해서라도 필요하다. 반복적인 일상은 농촌에서는 더욱 심하다. 매일 똑같은 마을 사람들을 만나고, 같은 시간에 소 밥을 주고, 때에 맞춰 논밭일을 해내야 한다. 슬프지만 앞으로 딱 20년만 살다가 죽고 싶다는 창호의 말을 단 한 번이라도 생각해 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일탈을 꿈꾼다. 다른 지역에서, 경험해보지 못한 일을 해보는. 익숙한 환경에서 잠깐 벗어나면 모든 것이 새롭게 다가온다. 그렇기에 다시 집으로 돌아온 은주의 모습을 끝으로 영화가 막을 내릴 때 알 수 없는 에너지를 전달받은 기분이다. 한 달간 은주의 일탈을 대리 경험하여 우리는 또다시 지겨운 일상을 살아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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