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평론단
최희서, 손석구 주연의 <베드포드 파크>(2026, 감독 스테파니 안)은 통속극의 얼굴을 한 로맨스 드라마다. 배경이 미국이고 인물들이 영어를 쓰지만 너무도 익숙한 한국 가족 구성원들과 그들 사이의 관계와 트라우마를 보여주며, 여주인 오드리와 남주인 일라이의 관계 설정 및 서사 진행도 로맨스의 문법을 따른다. 우리 집의 모습이기도 하고 옆집의 모습이기도 했던, 그래서 이제는 (나만의 혹은 주인공만의) 트라우마라 부르기에도 왠지 겸연쩍어지는 설정들과 전통적인 로맨스 구조를 돌파해 나가는 것은 두 배우의 힘이다.
30살에 캐스팅 된 후 37살에 제작자이자 배우로 이 영화를 세상에 내놓은 최희서는 배우 자신의 시간과 연기로 오드리의 뼈와 살을 입혀낸 느낌이다. 이민 2세대인 감독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담았기에 여주 오드리는 아빠, 엄마, 오빠, 직장 동료와 같은 주변인물들을 배치하여 비교적 쉽게 캐릭터를 이해시키는 반면, 남주 일라이의 복잡한 사정은 쉽게 설명해주지 않는다. 전처와의 통화, 뜬금없이 나타난 형, 백인 엄마와 같은 단서들을 던지듯이 보여주며, 눈앞에 펼쳐진 오드리의 가족사에 흩어져있는 일라이의 배경 단서들까지 더해져 다소 산만한 느낌을 준다.
그리고 극중 초반 로맨스의 주인공이라면 가지고 있을 법한 과거의 인연을 살짝 보여주는데, 이후 일라이의 정체에 혼돈을 주기 위함인지 일라이의 사정을 복잡하게 꼬아놨는데, 이것이 후반부 전말이 밝혀졌을 때 감정적 폭발에 효과적이었는지는 의문이다. 그럼에도 배우의 연기와 존재감으로 일라이라는 캐릭터를 설득력 있게 살려냄으로써 통속적인 재료와 작위적인 이야기를 두 배우가 감정적으로 납득시키는데 성공한다.
특히 오드리와 일라이가 자동차 앞자리에 나란히 앉아 한 화면에 잡히는 장면이 자주 등장하는데, 이때 둘이 쌓아가는 감정적 서사가 두 캐릭터와 그들의 관계를 설득시킨다. 오드리가 일라이가 좋아하는 밴드를 궁금해 하며 질문을 던질 때 일라이의 그 의아한 표정과 침묵. 차 안 라디오에서 록키 ost가 흘러나오고 카메라가 아주 천천히 줌인하며 두 사람을 잡는데, 일라이는 음악에 맞춰 리듬을 타고 그 옆에서 오드리는 감정이 북받쳐 눈물을 흘린다. 마주보지 않고 나란히 앉아 있기에 자신의 모습으로 편안한 두 사람을 보여준다. 이후 오드리가 일라이의 집에 저녁거리를 사들고 가 처음으로 두 사람이 대화다운 대화를 할 때도 거실 쇼파에 나란히 앉아 있다. 일라이가 마주보며 앉아 있는 형이나 엄마는 일라이에게 상처를 주는 존재라면, 나란히 앉아 있는 오드리는 편한 존재라는 걸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들이다.
나란히 앉아 있던 두 사람이 결국 서로를 마주보고 보듬으며 관계가 급 발전하지만, 그 이전에 두 사람이 나란히 앉아 쌓아온 시간이 감정적으로 더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그리고 어쩌면 25년 만에 한국에 와서, 이민 1세대로 딸이 감독이 되기를 바라지 않았을 엄마아빠에게 자신의 꿈을 보여줄 수 있게 되었다는 감독의 소감이 더 여운을 남겼을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