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평론단
영화는 이야기를 담기에 좋은 매체다. 그러나 이야기만 담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예술이기도 하다. 예술로서의 영화는 분명 이야기를 넘어서는 무언가를 보여준다(보여주어야만 한다). 김종관 감독의 <낮과 밤은 서로에게>는 러닝타임의 대부분이 인물의 대화로 채워져 있지만, 이야기에 몰두하지 않는다. 대신 이야기가 조금씩 변화시키는 것들에 집중한다. 예컨대 그들의 표정과 감정, 시간과 공간, 또는 공기. 즉 영화는 무수한 이야기가 생성되는 세계의 모습을 담는다.
대화를 포착하기 위해 카페는 딱 알맞은 장소다. 매일 새로운 손님들, 창문 너머로 보이는 계절의 단서들, 어쩔 수 없는 소음과 텁텁한 커피 향. 무엇보다도 그곳에는 우리에게 자리를 내어주는 범상한 테이블이 있다. 서로 다른 사람들이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한다. 그들의 관계는 희미하며 이야기의 주제는 계속 바뀐다. 논리적인 연결고리를 찾으려는 시도는 금세 무용해진다. 그러나 이야기가 영화 속에서 무언가를 변화시키고 있다는 사실만은 달라지지 않는다.
시계를 고친다. 신발 한 짝을 도둑맞는다. 주식으로 돈을 번다. 맨발로 밤 산책을 한다. 밤낮에 이루어지는 두 남녀의 상이한 대화는 영화의 편집을 통해 새로운 리듬을 얻는다. 남자는 시계의 작동 원리를 설명하고 여자는 시계에 담긴 추억을 말한다. 남자는 이상했던 꿈을 복기하고 여자는 현실의 감각을 되살린다. 영화는 두 세계를 플래시백으로 이어준다. 마침내 두 사람은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 놓이며, 조심스럽게 그들을 엮을만한 단서가 모습을 드러낸다.
기억도 나지 않을 정도로 오래된 추억은 망상증 환자가 되어 눈앞에 나타나고, 자기 소설을 드라마로 만들고 싶다는 감독은 무례한 말을 쏟아낸다. 서로를 칭찬하던 두 남녀는 덤덤히 이별을 고하고 떠나간다. 때로는 나란히 앉아 앞을 보고 때로는 마주보고 앉는다. 따뜻하고, 엉뚱하고, 지루하기도 하다. 어쨌든 시간은 흐르고 무언가 변한다. 그들의 위치, 목소리의 크기, 작은 몸짓, 창문 밖의 돌연한 움직임과 영화의 반응에 주목해 보자. 수많은 이야기에 짓눌려 놓치고 말았던 작은 순간들이 되살아날 것이다.
논리로 설명되지 못할 대화의 연쇄는 예상치 못한 접촉으로 갈무리되기도 한다. 말에 반응해 신체가 접촉하는 영화의 예외적 순간들이 당신의 살갗을 스친다면, 그건 이야기의 내용이 감동적이어서가 아니라, 세계의 원리가 이야기를 통해 잠시 흔들리는 순간을 보았다고 믿기 때문일 것이다. 어떤 영화는 거대한 야심을 품고 내달리지만, 어떤 영화는 세계를 찬찬히 변화시키는 카메라의 미약한 힘을 믿는다.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영화의 힘을 믿는 사람으로서 이 섬세하고 가냘픈 작품을 지지하는 것은 일종의 의무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