섹스와 자본에 관한 크로키적 실험영화 <둘 하나 섹스>를 만든 이지상 감독이 이번엔 영화 <돈오(頓悟)>로 만행의 길을 나섰다. 전작에 비해 형식적 파기의 힘이 다소 약화되긴 했어도 그의 영화적 서명이 되어버린 노란꽃에의 강박적인 천착이나 섹스를 통하 은유, 자조적인 춤사위와 실제와 허구를 교묘히 뒤섞은 의사다큐적 스타일은 <돈오>에서도 여전하다. 딱히 어떤 견고한 내러티브를 거부하는 영화 <돈오>는 캐스팅에 골몰하는 감독과 오디션을 받으러 온 한 여배우의 이야기를 제외하면 좁은 방 안에서 익명적 등장인물들이 벌이는 집요하고 숨가쁜 섹스장면으로 점철되어 있다. 이들 섹스신은 관객이 불편할 만큼 적나라하지만 섹스를 하나의 행위 자체로 추출하게끔 하는 힘이 있다. 이지상 감독에게 섹스란 바로 하나의 화두이며 따라서 그는 영화 속 섹스를 통해 ′돈오′를 욕망한다. 계속되는 섹스로 탈진한 채 혼자 남겨진 남자가 화면 밖으로 던지는 책과 텔레비전은 어느 새 관조적인 테오레아의 독재를 부정하는 몸짓이 되어 있다. 그러나 이 비워낸 공간에서 우리는 과연 진정한 돈오를 볼 수 있을까? 갑작스레 다가오는 깨달음을 포착하기엔, 그리고 섹스를 통한 감독의 영화적 만행에 동참하기에는 한 편의 영화가 너무 짧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