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영화의 결정적 순간들
2025년에 신설된 경쟁부문이 올해로 두 번째를 맞았다. 첫 해의 뜨거운 관심과 성과에 힘입어 올해는 출품작들의 수준과 층위가 비약적으로 높아지고 두터워졌다. 그 중 최종 13편의 작품을 선정했다. 동시대 아시아 영화를 대표하는 작품들이라 말할 수 있겠다.
<피오르>는 크리스티안 문쥬 감독의 이전 작품 <알.엠.엔.>(R.M.N.)의 심화버전이다. 우리의 삶의 모습을 결정하는 것은 법과 제도이고, 법과 제도를 만드는 것은 정치이므로 그의 영화는 ‘정치적’이다. 노르웨이 피오르의 풍경 위로 찬송가 연주가 느리게 흐르며 영화는 시작된다. 루마니아인 남편 미하이 게오르기우와 노르웨
3년 전 <찬란한 내일로>를 보며 난니 모레티의 마지막 인사 같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영화 세계를 전반적으로 아우르며 팬들에게 건네는 작별의 선물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가 돌아왔다. 이번 신작 <오늘 밤, 사랑은 일어난다>를 보고 나니 내가 너무 일찍 작별을 걱정했다는 생각이 든다. 아직 우리 감독님에게는 하고 싶은 영화가
때는 바야흐로 2013년, TV 저녁 뉴스에서 제18회 부산국제영화제 개막 소식을 알리고 있었다. 영화제 소식을, 개최 예정도 아니고 개막했다는 소식을, 티켓 카탈로그도 아니고 TV 뉴스로 접하고 있다는 충격. 내가 태어나 처음 TV로 소식을 접했던 부산국제영화제이자, 내 아이가 태어나 처음 맞이하는 영화제였다. 그리고 나는 그로부터 12년간 영화제를 찾지
아무도 없다던 혜미의 집, 옆방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온다. 아무것도 모르는 친구들은 웅성대고, 혜미는 뭔가 숨기는 게 있는 듯 좌불안석이다. 소음이 멈추지 않자 얼마 전 고양이를 데려왔다는 말까지 꺼내며 둘러댄다. 결국 친구들이 그 안을 보지 못할 정도로만 방문을 열고 그 소리의 원인에게 조용히 하라고 야단친다. 고양이의 정체가 화면에 드러나
일반적으로 영화에서 미래를 본다는 설정은 거대한 사건을 터뜨리는 동력으로 작동한다. 그러나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은 이 판타지를 고향 마을 길가의 낡은 벤치 위에 조용히 내려놓는다. 그저 벤치에 앉아 두 손을 모으고 눈을 감는 것. 이토록 단순하고 무해해 보이는 행위가 오히려 인상 깊은 이유는, 영화가 판타지를 장르적 쾌감의 볼거리로
영화 <아버지의 방>에서 미술관 큐레이터로 일하는 사토미(아오이 유우)는 죽은 아버지 유이치(잇세 오가타)가 생전에 보낸 열쇠를 우편으로 받는다. 사토미는 그 우편을 계기로 아버지의 흔적을 찾아 나선다. 영화가 다루는 주요한 소재 중에는 다도, 시가 있다. 이 두 소재의 공통점을 꼽자면 모두 진정으로 즐기기 위해서는 시간을 들여야 한다
조던 퍼스트먼 / 미국 / 2026년 / 122분 / 월드 시네마10.09 CI 12:00 / 10.12 SH 12:00 / 10.14 L4 15:10 뉴욕의 퀴어 클럽에서 파티를 기획하며 살아가는 피터(조던 퍼스트먼)는 밤마다 술과 약물, 새로운 만남을 즐긴다. 오랜 친구이자 사업 파트너인 소피(카라 델러빈)와 함께 클럽을 운영하지만, 나이가 들
오키타 슈이치 | 일본 | 2026 | 138분 | 경쟁 10.7 BH 12:20 / 10.9 B3 12:10 / 10.11 B1 22:20 / 10.14 KT 16:20 사토코라는 이름을 가진 세 여성의 옴니버스 서사가 펼쳐진다. 열다섯 살 사토코(히메노 카슌)의 가장 큰 관심사는 짝사랑하는 또래 친구다. 서른다섯 살 사토코(아리무라
파벨 파블리코프스키 / 폴란드 · 독일 · 이탈리아 · 프랑스 / 2026년 / 82분 / 아이콘 10.08 CX 13:20 / 10.10 CX 23:00 / 10.12 B2 10:00 1949년, 망명 생활을 끝내고 독일로 돌아온 토마스 만(한스 지슐러)은 나치의 과거를 딛고 민주주의 국가로 거듭날 독일의 미래를 이야기한다. 괴테와 예
코고나다 | 미국, 홍콩, 중국 | 2026년 | 100분 | 아이콘 10.14 L3 12:40 뇌종양이 의심되는 ‘지’(미셸 마오)는 환영 속에서 미래의 자기 자신을 본다. 환영 속의 ‘지’ 는 이름 모를 한 여성과 함께 있다. 오래 지나지 않아 ‘지’는 우연히 엘(헤일리 루 리처드슨)과 마주한다. 점점 기억을 잃어가는 것이 자신의 삶이
아스가르 파르하디 | 프랑스·이탈리아·벨기에·사우디아라비아·미국 | 2026 | 140분 | 아이콘 10.09 B1 21:40 / 10.11 C1 12:10 / 10.13 B2 10:20 소설의 영감을 찾던 작가 실비(이자벨 위페르)는 건너편 아파트에 사는 이웃들을 망원경으로 지켜보기 시작한다. 타인의 삶을 바라보며 이야기를 만들어가던
마린 아틀랑 / 프랑스 / 2026년 / 145분 / 월드 시네마10.08 C1 15:40 / 10.09 SH 12:50 / 10.13 L5 13:20 폼페이로 떠난 수학여행. 낯선 곳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는 동안 아이들 사이에는 호기심과 욕망, 설명하기 어려운 긴장이 흐른다. 달리는 기차와 수잔(수잔 게린)의 눈이 디졸브로 겹쳐지고, 기차 안에서
사람들은 흔히 특별한 존재가 되고 싶어 한다. 남들에게 인정받고, 성공을 이루고, 자신이 쓸모 있는 존재임을 증명하길 바란다. 하지만 삶에서 무언가를 잃고 나면 깨닫게 되는 것들이 있다. 특별할 것 없이 반복되던 일상, 당연하게 여겼던 관계, 그리고 그저 곁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했던 존재의 가치다. 대만 출신 리윈찬 감독의 영화 《평범하기 위하여》는 평
영화는 이야기를 담기에 좋은 매체다. 그러나 이야기만 담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예술이기도 하다. 예술로서의 영화는 분명 이야기를 넘어서는 무언가를 보여준다(보여주어야만 한다). 김종관 감독의 <낮과 밤은 서로에게>는 러닝타임의 대부분이 인물의 대화로 채워져 있지만, 이야기에 몰두하지 않는다. 대신 이야기가 조금씩 변화시키는 것들에 집중한
그리스 신화에서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는 설득과 구애의 여신 페이토(peitho)를 동반자로 데리고 다닌다. 컴백 콘서트를 사흘 앞둔 디바 ‘마더 메리’는 무대의상이 ‘나답지 않게 느껴진다’며 오래전 결별한 드레스메이커 샘을 찾아간다. 샘의 드레스가 마더 메리에게 무엇을 줄 수 있어서 그렇게까지 하는 걸까? 호러영화 팬에게
<내 친구로 남아줄래?>는 어촌 소년 준과 도시 소년 제스퍼의 비밀 우정을 담고 있다. 제스퍼의 부모는 태양광 발전소 일을 위해 대만 어촌 마을로 이사한다. 평화롭던 마을은 태양광 발전소 건립을 둘러싼 충돌로 소란스러워진다. 어른 사회의 갈등은 아이들에까지 전달되고, 아이들 역시 이익과 감정의 갈등을 겪는다. 이 과정에서 준과 제스퍼는 어른들은
용서에 대해 생각하는 밤이다. 용서해야 하는 사람도 용서받아야 하는 사람도 같이 살던 이웃이고, 심지어는 자기 혈육인 오빠고 부모다. 그걸 받아들여야 하는 사람들은 아니, 받아들이는 그것이 영화의 마지막이자 시작이다. 누군가는 죽였고, 누군가는 죽임을 당했다는 그 사실을. <베니마나>는 1994년 르완다 대학살 이후, 공동체 재판이
<멜트다운> : 아이의 눈높이만큼의 진실 마누엘라 마르텔리 감독의 <멜트다운>은 미스터리의 외양을 하고 있지만, 끝내 답을 내놓지 않는다. 한나는 늦은 밤 이네스의 사촌 오빠와 함께 숙소를 나선다. 날이 밝아도 한나는 돌아오지 않고, 함께 나갔던 사촌 오빠는 이미 돌아와 있다. 그날 밤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화곡사>에서 인물을 표현한 거친 질감은 확실히 깎아낸 듯한 매끈하고 선명한 표면보다 시선이 오래 머문다. 작품은 이 거친 질감을 고유한 미학으로 삼았지만, 아쉽게도 인물의 표정과 감정까지 뭉갠다. 특히 인물의 입술이 움직이지 않는 몇몇 장면에서는 표정을 만드는 얼굴 근육마저 경직되어 대사와 이미지가 따로 논다. 이
“살 길을 찾자! 살 길을 찾자!” 가게를 폐업하고 먹고살 길이 막막해진 태영(박송열)은 한낮에 달리며 구호를 외친다. 집에 돌아오자 소파 위에 누워 있던 주미(원향라)가 끌어안고 있던 인형을 내던진다. “어디 갔다 왔어!” 인형이 치워지자 눈에 들어오는 건 그녀의 부푼 배다. 직전에 난산으로 고생했던 부부였기 때문에 우리 마음도 덩달아 함께 부푼다. 그러
보름달 아래 달맞이 축제가 한창이다. 달집을 태우며 축제에 참여한 모든 사람들이 불꽃을 바라본다. 영화의 전환이 일어나는 장면이다. 영화의 결말 부분에 이르러서는 눈에 이슬이, 가슴에 감동의 물결이 인다. 따뜻한 영화이다. 사랑으로 충만한 영화이다. 큰 사건이 연속되지 않는데도 잔잔한 웃음과 긴장으로 서사가 진행된다. 정지혜 감독은 첫 장편 작품
녹진한 햇살이 들어오는 아늑한 방 안에 나란히 앉아 재잘거리는 앳된 얼굴 셋. 혜미와 친구들은 이런저런 얘기를 하며 장난을 치거나, 서로 마주보며 숨 넘어갈 듯 웃기도 한다. 우리로 하여금 이제 아득해진 교복 시절의 향수를 떠올리게 한다. 어리고 철 없는 학생이라는 정체성으로만 이들을 바라볼 수 있을까. 인생에서 가장 실수하는 시기. 호르몬에 지는 시기.
주인공 혜미(정민주)는 남들의 시선을 지나치게 신경 쓰면서 자신을 곤란하게 만든다. 그 누구보다 자기주장과 고집이 세 보이지만, 그 누구보다 남들의 시선을 많이 살피기 때문에 혜미의 세상은 이미 지옥과도 같았을 것이다. 특히 이런 혜미의 시련은 집에서도 잘 드러난다. 영화의 초반, 혜미는 친구들을 자신의 집으로 초대한다. 친구들은 혜미에
산책을 나서는 일과 자신을 산책자로 명명하는 행위는 다르다. 산책하는 사람에서 산책자의 마음을 가진 사람으로 나아가는 것. 신선 감독의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2026)은 로베르트 발저의 책 『산책자』를 가져와 주인공 은율의 산책을 따라가는 영화다. 은율은 데자뷔처럼 미래의 어느 순간을 보는 능력을 지녔다. 고향인 거제도의 한 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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